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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된 사람 - 김한규

먼저 된 사람 - 김한규 형은 먼저 형이 되었다 마마가 어린 몸을 먼저 지나갔다 남겨진 자국에 죽어 갈 날이 하루씩 파고들었다 동생은 형의 동생이 아니라고 했다 아랫목에서 식고 있는 밥그릇이 넘어지고 먼저 될 수밖에 없었던 형은 눈이 파묻은 취한 발을 끌며 집으로 오고 있었다 기미가 없는 봄이 꺼멓게 멍든 뼈를 드러냈다 얼어붙은 발은 끝까지 팔을 움켜쥐고 기다리지 않는 것은 기다리는 것을 내버려 두었다 얼마 남지 않은 날에 파먹을 수 있는 것은 다 파먹고 달력도 없이 넘어가는 얼굴을 벽 속에 묻었다 먼저 되고 만 사람이 버스에 올랐다 거두는 눈길을 먼저 거두었다 다 거둔 얼굴에 죽은 새의 날개 빛이 내려앉고 있었다 동생은 형의 동생이 아니었으면 좋았다 눈과 함께 어서 가 버리는 이월이었으면 좋았다 다시 ..

한줄 詩 2021.09.27

마스크에 쓴 시 4 - 김선우

마스크에 쓴 시 4 - 김선우 ​ 두껍습니다 이 밤은 유독 내 몫이 아니었던 생들이 무더기로 돋아 방 한칸의 벽을 이룬 듯한 이 밤은 뚫고 나가는 데 얼마나 걸릴까요? 우리라 부를 수밖에 없는 우리여 우리는 일상을 회복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그리워하는 일상은 폭력없이 평화로웠나요? 차별없이 따뜻했나요? 아이들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너희가 어른이 되면"이라고 말할 수 있었나요? 우리 손으로 미래를 목 조르고 있지는 않았나요? 내 손이 판 무덤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시집/ 내 따스한 유령들/ 창비 마스크에 쓴 시 13 - 김선우 1 어쩔 수 없이 빌린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빌려 쓸 수밖에 없는데 돌려줄 수 없어서 존재의 슬픔이라고 느끼게 되는 것들이. 실은, 함부로 빼앗은 것들이 더 많습니다. 이..

한줄 詩 2021.09.27

당신의 노동은 안녕하신가요? - 김경희

작년 말 한 후배가 직장에서 잘렸다. 표면상으로는 권고 사직이지만 코로나가 터지면서 회사가 워낙 어려워 하나둘 떠나는데 버티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반 년 이상 월급을 삭감하면서 버텼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 회사 내 분위기가 어차피 짤릴 텐데 알아서 나가라였단다. 근로기준법으로 보면 부당해고에 해당하지만 회사는 그 방식을 취하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도 이 후배는 약간의 위로금과 퇴직금을 정산 받을 수 있었다. 당연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회사가 망하면 퇴직금도 받지 못하고 직장을 잃는 경우도 있다. 노동자를 보호하는 근로기준법이 있지만 이 법도 어느 정도 큰 회사에 해당되는 법이다. 가령 상시 노동자가 5인 이하라면 연차 휴가는 먼 나라 얘기다. 연차 휴가는커녕 주 5일 근무도 지키지 않는..

네줄 冊 2021.09.26

너무 낭만적이거나 너무 실용적이거나 - 임후남

너무 낭만적이거나 너무 실용적이거나 - 임후남 가까이 숲이 있으면 좋겠어 상추 심을 텃밭이 있어야지 수국 한 그루 심을 정원도 있음 좋겠어 가까운 곳에 편의점이 있으면 좋겠어 지하철역은 가까워야겠지 그래도 조용한 곳이었음 좋겠어 실용과 낭만이 부딪치는 사이 욕망과 현실이 끓는 사이 집도 아닌 방 한 칸, 꿈은 너무나 비현실적 이 색에서 저 색으로 수국 한 그루 변덕스럽게 피고 지는 사이 하이힐 신고 산책하는 사이 *시집/ 전화번호를 세탁소에 맡기다/ 북인 나무와 몸 사이 - 임후남 나무와 나무 사이를 걸었다 그림자가 함께 걸었다 며칠 전 내린 눈이 그대로다 발자국을 옮길 때마다 눈은 온몸으로 나를 받는다 다정한 눈길은 내가 걸어갔다 오는 사이 어지러워졌다 늙어가는 동안 내 육체는 점점 더 무거워진다 생각..

한줄 詩 2021.09.26

뒤를 돌아보는 저녁 - 천양희

뒤를 돌아보는 저녁 - 천양희 길을 가다가 가끔씩 뒤를 돌아본다 말을 타고 달리다 이따금 내려 잘못된 것은 없나 뒤를 살펴보는 인디언처럼 두고 온 무엇이 있기라도 한 듯 뒤를 돌아본다 나도 모르게 생긴 버릇이다 뒤돌아보는 나는 지금 뒤편의 그늘을 보고 있는 것이다 뒤를 돌아보는 일이 나를 돌아볼 때처럼 어둑하다 내가 혼자가 되다니,,,,, 돌아보면 나는 나 자신을 추스른 것이다 세상에 할 기억이 많아 진퇴양난을 겪기도 한 모양이다 가던 길 돌아보다 세상 참 더럽게 시끄럽네, 참을 수 없을 때 물속에 비친 달빛 같은 정화론(淨和論) 한편 쓸 수 있겠다 나는 오랫동안 한길 가기를 원했으므로 지금은 오래 뒤를 돌아보는 저녁이다 *시집/ 지독히 다행한/ 창비 그늘에 기대다 - 천양희 나무에 기대어 쉴 때 나를 ..

한줄 詩 2021.09.26

가난의 잉여 - 조기조

가난의 잉여 - 조기조 중년이 되면서 연이어 허리띠 구멍을 늘이고 목 단추를 끼우기 힘들 정도로 군살이 늘어 은근히 걱정이다 살아오는 내내 가난했는데 중년에 느는 군살을 보며 필요한 양보다 많이 먹은 몸을 보며 가난조차 잉여였다는 생각이 든다 살아가고도 남는 것을 위해 싸우지 말자던 생각이나 미래를 위해 쌓아두지 말자던 거침없는 주장을 되새김질한다 가난조차 내 것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밖에 없는 중년의 잉여가 똑바로 걷고자 해도 뒤뚱거리게 한다. *시집/ 기술자가 등장하는 시간/ 도서출판 b 욕망의 무게 - 조기조 머리가 희끗희끗해지면서 무언가를 버리기 시작했다 친구들이나 동기간도 일부러 덜 만났다 시위가 있는 광장에 나가도 먼발치에서 서성이거나 글쟁이들과 될수록 어울리지 않았다 혹하지 않아야 한다는 나이..

한줄 詩 2021.09.26

사랑했지만 어쩔 수 없었던 어느 날 - 박남원 시집

아파트가 주된 주거 형태로 자리하면서 골목과 마당이 사라지고 있다. 가물가물하지만 내 어릴 적 살던 집은 허름한 초가였다. 마당 모퉁이에 장독대가 있고 한 켠에는 늙은 감나무가 있었다. 여름이면 누렁이와 장난을 치다 감나무 그늘에서 함께 낮잠을 자기도 했다. 바지랑대를 아는가. 지금이야 세탁기와 건조기를 거치면 편하게 빨래를 하는 시대지만 예전에는 빨래도 노동이었다. 어머니는 빨래터에서 빨아온 옷들을 마당을 가로지른 빨랫줄에 가지런히 널었다. 물기 머금은 빨래 무게 때문에 빨랫줄이 축 처진다. 이때 빨랫줄 중간쯤에 세워 축 늘어진 줄을 받쳐주는 바지랑대가 필요하다. 이 시집을 읽으면서 뜬금없이 어릴 적 마당에 서 있던 바지랑대가 생각났다. 황폐해진 내 마음을 바지랑대처럼 받쳐준 시집이기 때문이다. 물이 ..

네줄 冊 2021.09.23

그 나이쯤 되면 - 최준

그 나이쯤 되면 - 최준 아닌지, 문득 곁눈질로라도 어둠이 그리우면 몸이 쇠했다는 증거 누구나 그 나이쯤 되면 혼자 가게 되는 것 아닌가 그만큼 했으면 싸움질도 싫증이 나고 거친 숨과 뜨거운 몸도 식힐 줄 알지 않는가 열어놓은 마음 문틈으로 얼비치는 죽음 그림자 그걸 모시느라 여기까지 당도했다는 걸 깨닫게 되지 않는가 고통하며 세운 모든 것들이 결국은 세월 속에 무너내리는 소리 들리지 않는가 누구나 그런 죽음의 몸종으로 한세상 살아왔음을 아는 것 아닌가 길은 늘 생애보다 길게 마련인 것 그 길 도중에서 나 죽으면 눈 귀 어두워지면 남겨진 길로는 몸 떠난 마음만 갈 일인 것을 마음만 자욱히 운무에 헤매일 것을 그런 어둠 속으로 몸 끄느라 지친 마음만 죽음을 죽도록 그리워하는 것을, 그런 때 곁을 질러가는 ..

한줄 詩 2021.09.23

무화과 피던 자리 - 이문희

무화과 피던 자리 - 이문희 나무가 앓기 시작했다 남자는 야반도주를 하고 여자가 집을 나갔다 혼자 남은 무화과 이파리가 온 마당을 훑고 다녔다 우편함의 소문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확성기 소리를 몰고 다니던 트럭이 매일 오는 장이 아니라고 생선 비린내 진을 치고 채소가 떨이로 목청 돋워도 유학 간 딸아이의 혼령이 스타인웨이를 타고 흐르고 검은 정장의 사내들 레드카드로 경고하는 집 열리지 않았던 파란 철문을 연 건 영구차였다 액자 밖의 사람들 몇은 담장에 기대 숨죽였고 정원은 말라갔다 막 맺기 시작한 무화가 열매가 장례행렬 속으로 떨어지던 오후 *시집/ 맨 뒤에 오는 사람/ 한국문연 칸나가 저녁 문턱을 넘는 풍경 - 이문희 칸나가 피었는데 우린 왜 쓸쓸하죠? 시골 간이역 근처 허름한 여인숙 마당엔..

한줄 詩 2021.0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