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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에 관한 생각 - 박주하

줄에 관한 생각 - 박주하 거문고에 줄이 없었다면 누가 줄을 튕겨 심연을 건드려 보았을까 어미가 줄을 놓아 주었으니 새끼도 그 줄을 타고 지상에 발을 들였겠지 탯줄을 감고 노래 부르고 탯줄을 타고 춤을 추고 한 올 한 올 서로를 튕겨주는 믿음으로 즐거웠으나 약속에 매달리고 관계에 매달리며 그 줄 점점 얇아지고 가늘어졌으니 돌아갈 길이 멀고도 아득하여라 몸으로 엮었던 줄을 마음이 지워 버렸네 서로에게 낡고 희미해져 먼지처럼 가늘어진 사람들 요양원의 투명한 링거줄에 매달려 있네 잃어버린 첫 줄을 생각하네 *시집/ 없는 꿈을 꾸지 않으려고/ 걷는사람 가을비가 내리는 동안 - 박주하 비가 내리자 잔이 차오른다 잔을 비우면 다시 비가 내렸다 술잔을 풍등처럼 쥐었다 쥐었다가 놓고 놓았다가 쥐는 술잔이 입술과 소원을..

한줄 詩 2021.10.08

음지식물 - 최서림

음지식물 - 최서림 아직도 연탄을 때는, 연탄재처럼 사위어버린 둘째 형을 생각하다가 눈물이 찔끔 나왔다 펑펑 울어 보고파 울음통을 두들기고 두드려봤지만 텅, 텅, 빈 소리만 흘러나왔다. 중학을 마치고 고물상으로 들어가 망망대해 서울살이를 향한 돛을 올렸다. 음지식물 같은 여자를 만나 외떡잎 닮은 아이를 낳았다. 택시기사, 배달원, 경비원으로 옮겨 다니는 사이 불량품 돛이 금방 다 부서져버렸다. 외떡잎 아이마저 떡깔나무 숲에 뿌린 후 조카 결혼식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삭아버린 항구 같은 엄마가 해마다 설 추석이면 오지 않을 줄 뻔히 알면서도, 버스정류장에서 '독한 놈, 나쁜 놈' 중얼거리면서도 흐릿한 눈으로 내리는 사람마다 찬찬히 살펴보고 있다. *시집/ 가벼워진다는 것/ 현대시학사 가벼워진다는 것 - 최..

한줄 詩 2021.10.08

지는 저녁 속으로 홀로 떠미는 - 안태현

지는 저녁 속으로 홀로 떠미는 - 안태현 어두운 새 한 마리가 다시 돌아와 앉은 그 자리를 바라보는 일이 좋다 저녁 빛에 쌀을 씻어 안치고 오이냉국에 얼음 몇 조각을 띄워 휘휘 젓다 보면 생각 끝에 당신이 있다 가뭄에 논물을 끌어다 쓰듯 몇 번은 사정해서 옛일을 불러다 내 앞에 앉히곤 하는데 그저 지나가서 아쉽던 저녁처럼 몸이 뜨겁던 시절이 당신에게도 얼마쯤 있었으면 하는 게 내 속마음이다 시절과 시절 사이 내게 오는 아픔은 모든 것을 이해만 시키려 드는데 지는 저녁 속으로 홀로 떠미는 손들이 그 틈을 타서 솔기 터진 내 마음 어딘가를 툭 건드린다 돌확 같은 당신을 돌아와 고요히 고이는 수척한 밥 한술이란 *시집/ 최근에도 나는 사람이다/ 상상인 생활의 목록 - 안태현 고장 난 보일러를 고쳐서 뜨거운 물..

한줄 詩 2021.10.05

빈 구두와 날짜들 - 이자규

빈 구두와 날짜들 - 이자규 시간을 분리하다 발판을 분리하다 그림자도 따라 갔다 움푹 들어간 날짜가 제거되고 신경선을 걷었다 비는 내리고 스쳤던 등받이에 닳아빠진 낱말들 흰 유니폼들이 인공 웃음으로 지나가고 비바람은 사선이다 금속성 데이트를 등으로 새겨야 했기에 바퀴를 뜯어내는 기억을 붉은 녹이 말했다 날것들이 눈꺼풀에 날아들었다 빈 구두와 빈 모자 그리고 미소가 필수인 종양실과 바흐가 흐르는 채혈실 붉은 장미가 각혈을 부풀렸다 방천 둑 쇠비름 따위나 되어 꽉꽉 밟히고 싶은 불면 한쪽을 난도질로 쥐어뜯는다면 단풍잎 울음은 어느 휠체어에 앉히나 하늘이 낮아졌다 '당신이 밀고 내가 앉고 싶어' 내 말에 '여기까지 내 그릇인가 봐' 우북이 쌓인 말들만 난무했다 *시집/ 아득한 바다, 한때/ 학이사 허 씨는 매..

한줄 詩 2021.10.05

가짜 남편 만들기 - 강명관

나는 이런 류의 역사책을 좋아한다. 소설은 잘 안 읽지만 실존했던 사건을 지은이의 시각으로 재해석하는 책 말이다. 요즘 언론에 자주 나오는 검찰 사주라는 엄청난 사건도 언론이나 정치적 시각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지 않던가. 검사 관련 책까지 낸 한 국회의원의 교묘한 거짓말이 마치 진실처럼 받아들여지고 본질과 초점이 엉뚱한 곳으로 향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 책도 역사서로 분류할 수 있지만 그 역사 또한 당대에 내가 살았더라도 어떤 것이 진실인지를 가늠하기 쉽지 않았을 듯하다. 부끄럽게도 나는 이 책에 나오는 사건을 이번에 알았다. 강명관 선생의 책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더 늦게 알았을지도 모른다. 예전에 영화 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을 때도 우리 역사에 비슷한 사건이 있다는 것은 몰랐다. 내가 이 책을 단숨..

네줄 冊 2021.10.04

잊힌 후 - 박남원

잊힌 후 - 박남원 비수처럼 비끼는 말들과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사람들의 생각이 한없이 차고 낯설 때 사랑조차 마음 같지 않아 안개 낀 들녘에 홀로 떠돌 때 비에 젖은 자작나무 숲길을 걸어 소리 없이 나는 그곳으로 떠나자. 언젠가 세월도 다 지나고 그 많던 상처도 꽃처럼 지고 사람들에게 잊힐 것 다 잊힌 후 어느 한적한 시골, 바람에 갈잎 흩어지는 외진 마을의 한 흙집, 그 안에 그동안 까맣게 잊혔던 나는 오래전에 그곳에 들어가 있자. 그러다가 어느 날 우연히 마당 앞을 지나는 한 여자의 눈동자에 이슬처럼 잠시 머물렀다가 길고 어두운 시간을 되돌아온 연어 같은, 그 오래된 기억의 기척에 문득 이끌려 지나던 발걸음 잠시 머뭇거리게 하는 이왕이면 지친 다리와 힘겨웠던 기억, 외로웠던 가슴도 조금 적셔주는 한..

한줄 詩 2021.10.04

내 슬픔에 수저를 얹고 - 이은심

내 슬픔에 수저를 얹고 - 이은심 끼니때마다 호명되는 냄비가 덜컹덜컹 우는 것은 맞지 않는 뚜껑 때문인데 간처럼 졸아붙는 삼중바닥이 되지 못한 까닭인데 이를 테면 한술 밥에 배부르다는 착각이 한술 밥에 배불리려는 억지가 시궁쥐에게 갉아 먹히는 것인데 잊을 만하면 입속의 차가운 말들을 불태우고 그때 내 슬픔에 수저를 얹고 밥 먹어둔다는 말은 얼마나 고픈 말이었나 숙식제공과 월수입 보장의 한복판에서 몇 개의 뺨을 적시느라 다 써버린 눈물이 배불러오는 공복을 허겁지겁 퍼먹던 그때 밥이 밥을 굶기던 그때 꺼질 듯 말 듯한 신화 그것이 연민을 불살라먹던 불씨라는 걸 탈 듯 말 듯한 연민 그것이 불씨를 익혀먹던 신화라는 걸 아름다운 불구경을 건너면 뿌리내린 공복에게 젖 물리는 안부조차 누군가에게 먹히는 밥이어서 쉽..

한줄 詩 2021.10.04

오후의 느낌과 여행을 떠나자 - 임곤택

오후의 느낌과 여행을 떠나자 - 임곤택 이렇게라도 바람이 불고 한 대씩 자동차 지나가고 늙은 여자는 애초부터 늙도록 되어 있어서 더 예쁜 것을 얻어서 딸을 얻은 사람은 그렇게 행복해져서 살아 있어서 참 좋은 오후 두 사람이 탄 오토바이 앞사람의 허리를 두 손으로 감싼다 셋이 탄 자동차는 바퀴가 넷 등에는 배낭이 있고 이런 꿈을 꾼다 좋은 오후와는 어떻게든 늦게 만나서 채소를 함께 다듬고 반쯤 죽은 것에 물을 뿌려 반쯤 살리고 게으른 아이는 그냥 놔두면 된다 되도록 멀리 가기로 하였다 비가 예보되었다 가방에는 더 많은 자랑과 남는 식욕 뒤에 앉은 사람이 손가락 뻗어 저 앞을 가리킨다 둘인 듯 셋인 듯 그 이상인 듯 주머니엔 숟가락 하나씩 모처럼 하루가 빼곡히 채워지는 날 어쩌나, 그치기 싫다 *시집/ 죄 ..

한줄 詩 2021.10.03

밥숨 - 김윤환

밥숨 - 김윤환 아침을 거르고 점심을 건너뛰고 저녁에는 그냥 잤다는 그녀에게 먹고 사는 것이 죄가 될 리 있겠냐만 일 때문에 밥을 거르는 일이나 밥 때문에 숨을 거르는 일은 자기에게 죄를 짓는 일 이라고 말하고는 나도 식은 밥 한 숟가락을 뜬다 찬밥이 목구멍에 넘어갈 무렵 묵은 한숨이 가슴에 얹혔고 마음속에는 긴 괘종소리가 울렸다 밥과 숨을 함께 쉬는 일없는 하오(下午)를 나도 그리워했다 *시집/ 내가 누군가를 지우는 동안/ 모악 발인(發靷) - 김윤환 이별은 잔치 후 정리되지 않는 주방 같은 것 쌓인 그릇과 남은 음식물에 묻은 소음 물린 채 풀리지 않는 나사들 울음이 벼루에 녹은 먹이 되어 폭과 너비를 알 수 없는 어둠을 그리는데 발은 바닥에 닿지 않고 손은 하늘에 닿지 않아 만질 수 없는 얼굴이 비가..

한줄 詩 2021.10.03

다인실 다인꿈 - 신용목

다인실 다인꿈 - 신용목 밤의 창가에서는 허공과 사람이 하나의 창문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건너편을 바라보며 불을 끄거나 켜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누가 묻길래. 그는 착한 사람이라고 말해주었는데. 꼭 그는 슬픈 사람이라고 말한 것 같다. 침대의 잘못은 자신이 입구라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는 데 있다. 잠이 오지 않으면. 걱정을 만든다. 죄를 빼고 나면, 사랑은 남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착한 사람이다. 물속에 사는 사람처럼, 그네처럼, 시내버스 요금함에 거스름돈 떨어지는 소리처럼, 넘어졌던 아이가 일어나 탁탁 부딪치며 털고 있는 손바닥, 그리고 비행기. 무심한 밤하늘 한쪽 귀퉁이를 천천히 지나가고 있어야 한다. 검고 푸른 바다를 건너가는 그림자, 오로지 자신만을 가로지르며..

한줄 詩 2021.1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