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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속에 먼길이 생겼다 - 박지웅

입속에 먼길이 생겼다 - 박지웅 당신을 보내고 종유석처럼 서 있었다 그리고 먼 동굴이 되었다 말문 한번 여는 데 천년만년 걸리는 입이 되었다 내 입속에 먼길이 생겼다 지금은 말할 수 없다 입안은 다만 내생(來生)과 연결되어 있다 먼 훗날에도 오지 않을 먼먼 훗날에 이 쓸쓸함은 발견되리라 목울대에 희미하게 비치는 한 방울 유골, 한 알의 누(淚) 똑, 똑 떨어진 바윗물은 흰 어금니가 된다 캄캄한 잇몸에 아물지 못한 말들이 자라고 자라 한 겹 한 겹, 솟을새김 올리는 액체의 뼈 동굴 천장바닥에 맺혀 글썽이는 눈알들 당신의 늑골에도 눈감지 못한 것들이 이리 자라는가 한 방울의 전생(前生)을 데리고 와 한 방울의 전생(前生) 위에 내려놓는 일을 나는 사랑했으니 입속에서 살아가는 것들의 목록을 헤아리는 가을이 북..

한줄 詩 2021.10.11

오늘 바람이 불면 바람꽃 피어 - 유기택

오늘 바람이 불면 바람꽃 피어 - 유기택 지금 창밖에는 봄비 듣고 오늘 꽃이 불면 어떡하지 벼락같이, 나는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어제로 나를 만날 수 있는 날들이 하루가 줄었다 오늘이 그 마지막 날이면 미처 다 저물지 못하는 오늘로 그만이다 이 별에서의 작별은 늘, 오늘에 멈춰 있다 어제는 없고 내일은 언제나 너무 멀다 그래서,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꽃이 된다 지금은 손톱물 지두화 같은 바람꽃의 시절 수만 번의 손톱자국을 꽃잎으로 새기면서 오늘은 창백한 꽃물이 듣는 바람꽃이 핀다 나도바람꽃을 마지막 세우고 손톱 갈퀴 같은 바람 속에서도 꽃은 벌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매일 나는 오늘 또다시 어디서든 하염없이 멀다 지금도 밖에는 바람꽃이 불고 우리에게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줄곧 밖으로만 열..

한줄 詩 2021.10.11

바람꽃 - 김용태

바람꽃 - 김용태 날선 감정들도 세월 속에선 모두 다 풍화를 겪는 것인지 그러다가 하루에도 수만 번씩 감정은 물비늘처럼 흔들려 가지 않겠노라며 다짐해 놓고도 가만히 손 넣어 보면 어느덧 모질지 못한 마음은 그대에게로 가 있고 늘 기다려 맞던 그 곳으로 허망한 발길은 버릇처럼 향한다 한 때는 내 가슴 가장 깊은 곳에 두었던 사람 훗날, 어느 생 어느 별에선가 만나도 낯설지 않을 얼굴 뜨거운 이름이었던가 모든 별들 바람에 쓸리어 간 자리마다 하나 둘 당신 얼굴 바람꽃 되어 피어나 밤이면 밤마다 하늘가에 다가고픈 간절한 마음은 삼백예순날 가슴에서 그댈 비워낸 날이 없었다 말없이 그렇게 당신 보내고 살구나무 꽃 그림자 어른거리는 밤이 오면 난 문둥이처럼 서러워져 두 무릎 껴안고 자전하는 지구의 소리를 들어야만 ..

한줄 詩 2021.10.11

내 따스한 유령들 - 김선우 시집

김선우 시인이 새 시집을 냈다. 이전에 그의 시를 유심히 읽은 기억은 없다. 시에도 마음 가는 시기가 있는지 이번 시집을 들추며 여러 시에 공감을 했다. 시집 읽고 가능한 흔적 남기지 말자는 게 기본 모토이나 이 시집은 그냥 지나갈 수 없다. 코로나 시대에 쓰여진 시가 여럿 실렸고 지친 마음을 달래줄 위로와 희망적인 다짐을 새기게 된다. 인류는 더한 위기에도 살아 남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동안 인간이 저지른 악행을 경고하고 미래를 다짐 받는 것을 잊지 않는다. 작은 신이 되는 날 - 김선우 우주먼지로 만들어진 내가 우주먼지로 만들어진 당신을 향해 사랑한다, 말할 수 있어 말할 수 없이 찬란한 날 ​ 먼지 한점인 내가 먼지 한점인 당신을 위해 기꺼이 텅 비는 순간 ​ 한점 우주의 안쪽..

네줄 冊 2021.10.11

노을 지게 - 하외숙

노을 지게 - 하외숙 그가 평생 해온 일은 무릎 꿇는 일이었다 이삭 팬 보리처럼 깔끄러운 자식들 타관으로 떠나보내고 밭장다리로 남대문 시장 비좁은 계단 오르내리는 사이 꽃이 피는지 잎이 지는지 청춘은 돌개바람처럼 휘리릭 지나갔다 작달막한 키 짓누르는 등짐 앞에 지겟작대기 하나로 버텼을, 그가 바닥을 치고 일어설 때마다 종아리에 푸른 힘줄 돋을새김하고 절뚝이며 어둠 속으로 사라지곤 했다 그가 지게를 닮아 가는지 지게가 그를 닮아 가는지 굽은 등에서 뻗어 나온 지겟가지 양쪽 어깨 착 달라붙어 내려놓지 못하는 굴레 구부정한 등에 노을 한 짐 지고 허우적허우적 걸어간다 *시집/ 그녀의 머릿속은 자주 그믐이었다/ 시와반시 개망초 - 하외숙 소소한 바람에 자주 흔들렸네 망할 망으로 태어나 망친 날도 많았네 바람을 ..

한줄 詩 2021.10.10

발광고지(發狂高地) - 서윤후

발광고지(發狂高地) - 서윤후 버려진 산소호흡기를 핥다가 어린 고양이 입김 서리는 것을 본다 무언가 닦아내면 어떤 것이 사라질 것만 같다 이를 모든 것이라고 부르는 아른거림만이 유일한 궁금증 또, 또 지리멸렬한 날씨 무너진 성곽이 더이상 관여하지 않는 잘 닦아놓은 미래가 있었다 모두가 돌아오게 되는 반환점으로 숨 쉬는 것을 가여워하게 되는 전개를 펼치고 그 사이사이의 안개 오리무중의 발진이다 창광하는 밤벌레들처럼 거리로 나온 아침 인간의 얼굴을 구경한다 전망할 수 없는 표정들에 휩싸여 있으면 어린 고양이의 숨 같은 건 별로 중요해지지 않는다 또, 또 어두워지려는 심장 들리지 않는 것을 어둡게 하면 꿈 밖으로 나와 소리치는 빛 환호는 환희의 별미라도 되는 듯이 인간을 재주넘는 (영혼, 마음 다음에 생각나는..

한줄 詩 2021.10.10

천문의 즐거움 - 김선우

천문의 즐거움 - 김선우 ​ 하늘을 오래 바라보다 알게 되었다 별들이 죽으면서 남겨놓은 것들이 어찌어찌 모여서 새로운 별들로 태어난다는 거 숨결에 그림자가 있다는 거 당신도 나도 그렇게 왔다는 거 우리가 하나씩의 우주라는 거 ​ 수백억광년의 과거로부터 오늘에 이른 빛의 내음 소리의 촉감 온갖 원자들의 맛 ​ 지구에서 살아가는 나는 가끔 죽은 지 오래인 별들의 임종게를 발굴해 옮겨 쓴다 ​ 그대들이 세상이라 믿는 세상이여, 나를 받아라. 내가 그쪽을 먼저 사양하기 전에. ​ 오늘 아침 닦아준 그림자에서 흘러나온 말 임종게가 늘 탄생게로 연결되는 건 아닐 테지만 가끔 유난히 아름다운 탄생의 문양들이 있어 우주가 지나치게 쓸쓸하진 않았다 *시집/ 내 따스한 유령들/ 창비 티끌이 티끌에게 - 김선우 -작아지기로..

한줄 詩 2021.10.10

서쪽에서 부는 바람 - 박상봉

서쪽에서 부는 바람 - 박상봉 때로는 서쪽에서 바람이 불기도 한다 바람이 하는 일은 나무의 잔가지를 흔드는 것이지만 한뭉치 댓바람이 불어와 나무둥치를 흔들거나 뿌리째 뽑아놓고 가기도 한다 더러는 바람에 가슴이 베일 때가 있다 깊이 파인 상처와 그만큼의 흉터를 남기고 가기도 하는 것이다 우기가 다가오는 기미를 먼저 알리는 것도 바람의 일이다 바람이 한바탕 구름을 몰고 올 때가 있는 것이다 억수같이 퍼붓는 비를 나는 좋아한다 나 대신 울어주는 비바람이 고맙기 때문이다 *시집/ 불탄 나무의 속삭임/ 곰곰나루 귀를 빼 서랍에 넣어두었다 - 박상봉 갈수록 이명이 들린다 미처 알아듣지 못한 말 남겨둬야겠기에 귀를 빼 서랍에 넣어두었다 나무에 박인 옹이 같은 것들 차마 버리지 못하고 나중에 꺼내 볼 요량으로 넣어둔 ..

한줄 詩 2021.10.09

과녁은 빗나가거나 묘미를 찾거나 - 김지헌

과녁은 빗나가거나 묘미를 찾거나 - 김지헌 목표물을 살짝 비켜갈 때 이미 빈틈은 뒤통수를 보이고 말았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지점도 이미 빗나간 화살이 관통한 곳 목표지점에서 빗나가는 것이 생의 묘미라는 듯 생각도 말도 자꾸만 과녁을 비껴가 엉뚱한 곳에 꽂힌다 타클라마칸의 오지 여행가처럼 검은 고비의 길을 찾아 나선 적이 있다 모래 위에 지문 하나 남기지 않고 애초의 과녁은 잊은 채 허밍을 날리며 돌아온 적이 있다 어디에도 나의 단서를 드러내지 않았다 저녁 식탁에서 당신과 내가 같은 석양을 바라보게 될 줄 몰랐듯이 지금 여기는 어쩌다 빗겨 간 우연 대륙 어딘가에서는 폭우가 마을을 삼키고 가족을 뿔뿔이 해체시키며 악마의 혀를 날름거리지만 지금 나의 빗소리는 애인의 손가락처럼 섬세한 맛 해체와 몽상 사이에서 ..

한줄 詩 2021.10.09

유유의 귀향, 조선의 상속 - 권내현

강명관 선생의 가짜 남편 만들기를 읽고 이 책까지 읽게 되었다. 같은 사건을 저자의 시각에 따라 다른 관점에서 해석한 것이 흥미로웠다. 공교롭게도 비슷한 주제의 책이 같은 해에 출간되었다. 이 책이 강명관 선생보다 2개월 먼저 나왔지만 내가 안 건 강명관 선생 책이 먼저였다. 그런 점에서 사람도 책도 인연이 있어야 만날 수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내가 세상의 모든 책을 읽을 수 없음에야 가능한 좋은 책을 읽고 싶다. 나이 먹을수록 미사여구의 달달한 문학 책보다 인간의 본질을 생각하게 하는 이런 책에 더 눈길이 간다. 은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는 제목이다. 제목에 지나친 욕심이 들어가면 되레 의미가 퇴색된다고 본다. 어쨌건 이 사건이 워낙 흥미로워서 이 책도 단숨에 읽어낼 수 있었다. 유유 사건 해석은..

네줄 冊 2021.1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