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줄에 관한 생각 - 박주하

마루안 2021. 10. 8. 22:12

 

 

줄에 관한 생각 - 박주하


거문고에 줄이 없었다면
누가 줄을 튕겨 심연을 건드려 보았을까

어미가 줄을 놓아 주었으니
새끼도 그 줄을 타고 지상에 발을 들였겠지

탯줄을 감고 노래 부르고
탯줄을 타고 춤을 추고
한 올 한 올
서로를 튕겨주는 믿음으로 즐거웠으나

약속에 매달리고
관계에 매달리며

그 줄 점점 얇아지고 가늘어졌으니
돌아갈 길이 멀고도 아득하여라

몸으로 엮었던 줄을 마음이 지워 버렸네
서로에게 낡고 희미해져
먼지처럼 가늘어진 사람들

요양원의 투명한 링거줄에 매달려 있네
잃어버린 첫 줄을 생각하네

 

 

*시집/ 없는 꿈을 꾸지 않으려고/ 걷는사람

 

 

 

 

 

 

가을비가 내리는 동안 - 박주하

 

 

비가 내리자 잔이 차오른다 잔을 비우면 다시 비가 내렸다 술잔을 풍등처럼 쥐었다 쥐었다가 놓고 놓았다가 쥐는 술잔이 입술과 소원을 주고받았다 

이 술잔이 기력을 다하면 가을비가 그칠까 누가 앞에 없는데도 혼자 중얼거리는 가을비, 비가 넘치는 소원을 받아먹더니 폭풍처럼 울었다

가을비가 내리는 동안 내가 알고 있던 영원들은 모두 뒷걸음질 치며 달아났다 녹아내린 말들을 찾아 젖은 손을 닦고 소원을 헤어 보는 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말들이 밤새도록 창을 넘나든다 중얼중얼 빗소리, 이 물색없는 영혼은 대체 어느 전생의 내가 보낸 사람이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