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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착역 근처 - 최영철

종착역 근처 - 최영철 오래 전 한 깨달음 얻은 그 사람 망자 앞에 문상하며 덩실덩실 춤췄다 하나 나의 도는 그에 미치지 못해 돌아서서 빙그레 웃을 뿐이네 아 이제 그대는 살기 위해 고개 숙이고 헛웃음 날리고 죽기 위해 지랄발광 술상 뒤집지 않아도 될 터 그리워 목말라 울부짖고 아닌 척 근엄하게 먼 산 바라보지 않아도 될 터 탄생에 환호하고 여기를 떠나 새 행장 챙기기 바쁜 여행자 앞에 목 놓아 통곡하지 않아도 될 터 한평생 내 그림자로 동행하며 다음 여정 설계해 준 고마운 이 저승사자 손을 뿌리치지 않다도 될 터 지옥이라도 그보다 더한 천국이라도 아 이번이 이 어리석은 암행의 종착역일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말할 수도 있으리 굳이 그런 사족 달지 않아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으리 *시집/ 멸종 미..

한줄 詩 2021.10.01

이런 날이 왔다 - 이시백

이런 날이 왔다 - 이시백 사람이 존귀한 세상에 사람이 대접받기 어려운 세상이 왔다 친척 집에 가는 것도 민폐이고 결혼식에 상갓집에 가는 것도 민폐가 되는 세상 날마다 달마다 이리 사는데 제발 년년세세 그러지 않기를 우울이 넘치는 요즈음 새삼 개들이 위대해 보인다 2m의 목줄에 묶인 채 끊임없이 짖고 꼬리를 흔드는 행동이 대단하다 혹시 나는 어떤 목줄에 묶여 있나 따져 본다 몇 푼 안되는 월급에 묶이고 동호회에 묶이고 함량 미달인 건강에 묶이고 찾아보면 너무 많다 사실 중요하게 묶이는 게 더 있는데 양심이 걸린 문제라 차마 못 적겠다 *시집/ 널 위한 문장/ 작가교실 지천명 - 이시백 고백하건데 언제나 내가 품은 생각은 누런 황금을 거침없이 차지하는 거였다 막연하게 언젠가는 꼭 차지하리라는 믿는 구석이 ..

한줄 詩 2021.09.30

여우 - 육근상 시집

육근상 시집은 제목부터 간결하다. 이전부터 그랬다. 이번이 네 번째 시집인데 . , 등 모든 제목이 간결하다. 시집 이름도 한자를 병기하지 않으면 금방 이해가 되지 않을 제목이기도 하다. 요즘 시집 제목이 대체적으로 길고 달달해지는 경향이 있다. 제목 장사를 무시 못할 일도 아니나 일단 설탕과 색소를 듬뿍 넣고 보는 것이다. 코로나로 심신이 지쳤는데 시집이라도 달달하면 좋지 않냐고? 한편 맞는 말이기도 하다. 나는 이런 때일수록 노래는 슬프고, 영화는 가슴을 후벼 파고, 시는 시고 떫어서 눈이 뻐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주변에 행복한 사람이 많은데 나라도 조금 불행하면 그것도 일종의 역설적 위안 아닐까. 좋은 게 좋은 거라며 그냥 넘어가지 못하는 삐딱한 아웃사이더는 어쩔 수 없다. 육근상 시인은 진국 같..

네줄 冊 2021.09.30

내게도 용 문신을 새기는 밤이 오리라 - 김왕노

내게도 용 문신을 새기는 밤이 오리라 - 김왕노 ​오래된 TV 드라마 한 장면에서 한밤중에 마당에서 줄넘기를 하자 뭐 하느냐고 물으니 고독에 몸부림친다 해서 웃은 적이 있다. 그때 웃을 일이 아니었고 지금 나도 고독해졌다. 친구와 휩쓸려 1차 2차 술자리를 하다가 3차 노래방에서 그 겨울의 아침을 부르고 장밋빛 스카프를 부르던 날이 꿈이었나 싶다. 스마트 폰의 많은 연락처 중에 선뜻 눌러야 할 이름이 없다. 이렇게 고독한 날은 화투 패를 뜨거나 전신에 문신을 새기고 싶다. ​몸을 화판으로 더 이상 고독하지 말라고 나와 함께 살아갈 문신을 새기는 것 깍두기처럼 가끔 어깨에 힘을 넣고 꿈틀거리는 문신을 과시하는 것 닭 피로 문신을 새기면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순하게 느끼도록 사군자를 새기든지 풀꽃을 새겨..

한줄 詩 2021.09.30

아현동 가구거리 3 - 전장석

아현동 가구거리 3 - 전장석 도무지 기분을 맞출 수 없는 동네가 있다 사람들 하루 종일 북적이다가 쓰레기 더미처럼 새벽이면 다소곳한 동네 불쑥 석류알 붉은 잇몸을 내미는 동네 반짝하던 불빛만큼 반색하는 늘 그 모습이라서 강의 묏등으로 출렁이던 노래 표정 밖으로 기분이 흘러들면 설탕을 듬뿍 묻힌 빵처럼 부풀어 올라 그 동네와 가끔 친해지고 싶어 골목을 서성이다 보면 나는 그 동네를 잘 아는 사람 그러다가 더 꼼꼼하게 기억하는 사람이 나라면 비 오는 가구거리 천막 아래서 가구들의 자세와 나이를 묻고 싶어져 오늘은 정말 무엇이든 축축해져서 고양이 발자국도 흉터가 되는 사람에게 바닥까지 내려간 얼굴은 기분이 만든 천성 때문이라고 말하지 그를 경유해 가보지 못한 곳이 있다면 임대 딱지 덕지덕지 붙어 있는 가구거..

한줄 詩 2021.09.30

전생 - 홍성식

전생 - 홍성식 먼지라고 했다 아니, 저건 먼저 떠난 사람들의 눈물이야 사막이라고 했다 천만에, 길을 잃은 자들의 당혹일 걸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내 별의 고리를 보았다 아버지가 보낸 추기경들이 진노했다 비밀을 발설한 자는 손톱이 뽑혔다 삼십 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생일 할머니의 쪽진 머리칼은 더디게 색을 잃어갔다 육만 마리 낙타의 주인인 그녀의 아들 마흔여섯 총독들은 달마다 조공을 바쳤다 목소리 굵은 이웃 별 사신이 오던 날 먼지 속에 떠 있던 헤픈 여자들이 웃었다 망측하게도 일처다부가 보편인 별 아버지는 엄마라는 호칭을 경멸했다 할머니는 아들만을 사랑한다고 했다 둘의 다툼 앞에서 나는 오줌을 지렸다 깨어나지 못할 토성에서의 꿈. *시집/ 출생의 비밀/ 도서출판 b 출생의 비밀 - 홍성식 범선으로 요하네..

한줄 詩 2021.09.29

그러니까 내 말은 - 김상출

그러니까 내 말은 - 김상출 눈물이 흘러나오는 길을 따라 그 안쪽 끝까정 들어가보믄 거기 분명 작은 읍내에 어울릴 법한 이쁜 간이우체국 하나 있을 거여 자네가 이래 몇 날 며칠 우는 거는 거기서 자꼬 슬픈 편지를 쓰고 있는 누가 반드시 있는 거여, 하믄 그러니께 내 말은 말이여 자네도 이렇게 자꼬 우지만 말고 거기로 편지를 쓰라 이거여 인자, 편지 고만 보내라고 울 만큼 울어서 눈물 다 말라부렀다고 또 머이냐 인자는 나도 좀 살아야 쓰것다고 아 언능 쓰란 말이여 *시집/ 다른 오늘/ 한티재 세월을 만나다 2 - 김상출 마루에 놓인 빈 박스는 서너 켜 더 올라가 있고 우편함에는 오랜만에 KT 요금고지서가 담겼다 늙은 개는 짖어보려고 두어 번 목을 추스리다 그만둔다 주인은 보이지 않고 이웃집 벽을 타고 오르..

한줄 詩 2021.09.29

오래 병에 정들다 보니 - 손진은

오래 병에 정들다 보니 - 손진은 오래 병에 정들다 보니 알겠다 병에도 위계가 있다는 걸 사막의 사자처럼 센 놈이 늑골언덕 깊숙이 사무치면 위아래서 빼꼼히 얼굴 내밀던 치들은 얼른 엎드린다는 걸 그러다 그 정든 병 유순해질 즈음이면 꼬리뼈에 핏줄에 마음의 살들에 숨어 살던 밀사들 얼른 고갤 들어 세력 다툰다는 걸 때로 다른 불우의 습격에 스러져 간 놈들, 내 영토는 버려진 마음들과 병이 암수가 되어 식구를 들이고 곁에 눕고 몸을 내줬다는 걸 지금도 엑스레이를 보면 내 몸의 왕국 점령하고 나부끼며 쇠락해 갔던, 때로 통보도 없이 왔다 간 환후의 연혁 아련히 남아 있다는 걸 그런 줄도 모르고 많은 미망과 헛것에 골몰했던 불모의 영지에 파란만장 술과 국밥, 울음과 다정 흘려보냈던 목구멍의 뻔뻔함! 오오래 병과..

한줄 詩 2021.09.28

봄볕이 짧다 - 김영진

봄볕이 짧다 - 김영진 ​ 눈동자 스민 황달 이제 얼굴 덮쳤다 예순넷까지 삶 언덕 가팔랐고 병원 중환자실로 실려오기 전날까지 자활 공공근로로 쓰레기 치웠다 외래진료 받아도 출근 거른 적 없던 분 댁을 찾아가 이층 단칸방 문 두드렸다 홀로 조용히 떠나도록 한사코 가만 두라 했으나 방 안에 그냥 둘 수 없어 구급차 불렀다 병실 유리창으로 달려드는 봄볕, 기운 없는 손을 잡고 이마 머리카락 넘겨드린다 혼자 살아오신 삶, 유일하게 연락 닿는 남동생에게 알리지 말라 부탁하셨지만 그 말씀 들어드릴 수 없었다 기운 내세요 이겨 내셔야죠 물으니 아주머니 샛노랗게 웃으신다 병실 비춘 봄볕이 짧다 *시집/ 영구임대아파트 입주 문의/ 문학의전당 철근 인생 - 김영진 ​ 어릴 적 넝마 덮고 자란 그이 뼈마디는 철근마냥 굵고 ..

한줄 詩 2021.09.28

한낮 - 육근상

한낮 - 육근상 대밭에 흰 새 울다 날아갔다 천둥 번개 불러들인 대추나무도 슬퍼하였다 강 마을 들어서는 샛길은 또랑 만들어 며칠 수근거렸다 땡볕이 채마밭에 날개짓 털었다 마루턱 기대 댓잎이 쓰는 글 몇 줄 읽다 받아쓸 요량으로 고쳐 앉으면 풀잎은 강물 소리로 흔들리다 울음 터뜨렸다 마루가 걸을 때마다 슬픈 노래로 찌걱거리자 고욤나무가 주렁주렁 매달린 그늘 뒤란에 뿌려놓았다 마당이 바람도 없는 한낮이라 눈부시게 적막하였다 *시집/ 여우/ 솔출판사 볕 - 육근상 품속 같다 무엇이든 끌어안고 있으면 한 생명 얻을 수 있겠다 겨우내 버려두었던 텃밭도 품속 따뜻했는지 연두가 기지개다 뽀족한 입술 가진 호미도 헛바닥 넓은 꽃삽도 품속 그리웠는지 입술 묻고 뗄 줄 모른다 나를 품었던 엄니도 이제 품속 돌아가려는지 양..

한줄 詩 2021.0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