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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이라고 하고 벗이라고도 하는 - 손진은

벚이라고 하고 벗이라고도 하는 - 손진은 어느 쾌활한 구름이 뛰어내려 일 년에 한 여드레쯤 길고 긴 띨 공중에 펄치다 가시나 허물어진 성, 장렬히 전사한 대왕의 혼령이 그 먼 옛 기억을 불러 올해도 저 뽀얀 성벽을 세우시나 이름이 벚이라고도 하고 벗이라고도 하는, 그 많은 연셀 자시고도 여전히 화사한 족속들이 피워 올린 낭하 속 의무와 간섭에서 벗어난 저 바알간 볼우물의 천사들이, 벌 떼와 삼겹살과 햇살 바람들과 얼려 걸어간다 이름이 벗이라고도 하고 벚이라고도 하는, 무뚝뚝한 가지들이 오물오물 축조한 순결한 저 혼(魂)들의 성! 잃어버린 심장을 찾으려 가릉거리는 우리 안의 원숭일 달래려고 하늘은 한 번씩 여린 목젖의 환하고도 정결한 성가곡 허공 가슴에 흩뿌리시나 *시집/ 그 눈들을 밤의 창이라 부른다/ ..

한줄 詩 2021.10.20

초록빛 네온 - 홍성식

초록빛 네온 - 홍성식 절뚝이는 짐승 하나 지하도를 지난다 봄은 기다림을 거부했다 박제된 올빼미의 눈동자는 수정처럼 차갑고 사람이 아닌 겨울이 사는 집 누가 있어 세상을 울음 없이 견딜까 빈민가를 둘러싼 흉흉한 소문 소녀들의 어깨는 갈수록 야위어가고 곰보다 먼저 겨울잠에 드는 경찰들 북쪽에서 불어온 바람에 벽지마저 움츠러들면 초록빛 네온등 하나 터무니없이 휘황한데 없는 길을 찾아 떠돈 건 아닐지 부표 없는 오징어잡이 배의 막막함 지난한 세계를 먼저 살다간 이들의 혼일까 또 다른 생애를 비추는 흐릿한 초록 불빛 암전된 몸이 잠시 잠깐 환하다. *시집/ 출생의 비밀/ 도서출판 b 자두나무 아래서 - 홍성식 탕진에만 익숙했던 아버지 첫아이를 가진 엄마는 툭하면 하혈을 했다 구포시장 좌판 위 빨간 자두 하나만 ..

한줄 詩 2021.10.20

숨뿌리 - 안태현

숨뿌리 - 안태현 숨에도 볼 수 없는 뿌리가 있다 이식도 안 되고 재배도 안 되는 내 앞가림도 못하던 시절 가파른 언덕에서 뛰어내리다가 죽을 뻔한 적이 있었다 숨이 턱 막혀 마른 가랑잎처럼 몸을 뒤틀자 겁에 질린 동무들은 다 도망가고 어둠의 구렁텅이에서 겨우 되찾은 숨뿌리 조금씩 숨에 숨을 이어가며 살았구나, 안도하던 눈물 가끔 산에 오르다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면 그때의 숨뿌리가 보인다 내가 나무의 세포인지 고래의 후손인지 모르지만 숨 쉬는 일은 어쨌거나 우주에 입술을 대고 삶을 맛보는 것 숨을 쉬고 있으면 어쨌거나 사람이라고 부르겠지 말도 걸어오겠지 *시집/ 최근에도 나는 사람이다/ 상상인 저무는 하루 - 안태현 -석굴암 지하다방 2 좁쌀처럼 속 좁은 주방장 잔소리에 온종일 붙들려 있다가 겨우 풀려나..

한줄 詩 2021.10.20

골목의 약탈자들 - 장나래, 김완

코로나로 모든 일상이 엉망이 되었다. 폭풍우라면 지나가길 조용히 기다리면 잠잠해지련만 이런 전염병은 겪어 보지 못했으니 어떻게 헤쳐나갈지도 막막하다. 대통령도 국민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겨 나가야 하는 것도 결국은 사람이다. 코로나라는 전대미문의 전염병으로 가장 고통 받는 사람은 자영업자들이다. 물론 쑥대밭이 된 항공이나 여행 업계보다는 덜 하겠으나 유행이 심해질 때마다 영업을 금지 당하거나 시간 제약으로 막대한 손해를 입은 것은 사실이다. 물론 코로나 때문에 되레 호황을 누리는 업계가 있다. 일부 업종은 오히려 창업이 활발하다고 한다. 우연히 자극적인 제목의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이라니,, 창업 시장에서 호갱이 안 되는 법을 알려주는 책이다. 인간 세상에는 어디든 뒤통수 쳐서 먹고 사는 사람이 있다..

네줄 冊 2021.10.20

내 장례식에 오지 마라 - 김해동

내 장례식에 오지 마라 - 김해동 길바닥에 납작하게 눌린 고양이 말라붙은 주검을 시위하고 있다 누구나 한번은 세상 가장 슬픈 기호가 되어야 한다 삶이란 야생고양이처럼 세상 어디든 헤집고 다니다가 홀로 남겨졌을 때 언제 떠날지 모르는 차 밑에서 노심초사하다가 또 다른 차의 밑바닥으로 파고드는 것 함께해준 많은 시간들은 참으로 고마웠고 그 시간들 때문에 내 시간들을 채울 수 있었다 나는 내일 또 담장을 뛰어오를 것이고 한순간 헛디딘 발밑으로 천길 고요를 볼 것이다 내 장례식에 오지 마라 *시집/ 칼을 갈아 주는 남자/ 순수문학 그립다는 것은 - 김해동 그립다는 것은 실체가 없어도 스스로 충만해지는 것 그립다는 것은 가슴 속에 불덩이 하나 품고 불면의 밤을 지새우는 것 그립다는 것은 야생화를 뿌리채 뽑아 아무..

한줄 詩 2021.10.18

귀는 소리로 운다 - 천양희

귀는 소리로 운다 - 천양희 귀뚜라미 소리가 귀 뚫어, 귀 뚫어 우는 것 같다 그동안 내가 귀를 닫고 산 까닭이다 네가 나를 견디는 동안 눈을 닦고 보아도 산빛은 어둡고 강물은 먼 데로만 흘러가 꽃 지는 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이 세상 모든 소리는 비명 같아 귀에 한 세상 넣어주는 소리만이 침묵을 대신하는 유일한 문장이라고 쓰고는 하였다 어디서 오는 소리든 슬픈 소리는 눈으로 듣고 귀는 소리로 운다고 귀 뚫은 듯 귀 뚫은 듯 이렇게 자꾸 귀 기울여보는 것인데 나는 이제 다른 소리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지게 되었다 귀는 소리로 운다 *시집/ 지독히 다행한/ 창비 어떤 충고 - 천양희 빗자루처럼 걸레처럼 살기 위해 집을 떠난다는 한 사람의 낮은 말을 들었을 때 문득 인도에서 만난 헐벗은 여자 거지가 생각났다 ..

한줄 詩 2021.10.18

월간 현대시 2021년 10월호

베껴 쓰는 습관 - 최준 대문 없는 옆집 혼자 사시는 무당 할머니 지붕 위 낡은 깃발은 신통력의 은유(隱喩)인가 허리와 무릎을 앓고 보청기로 세상과 소통하지만 유모차 밀 힘이 발바닥에 여즉 남아 복대와 고통의 어시스트로 집 앞 텃밭을 가꾼다 내 집 앞 블록담장 밑에도 오이 모종 하나 심어주셨다 중부내륙 적설(積雪)이 다시 초록의 망망대해를 일굴 때까지 점 보러 오는 이 못 봤다 마당 구석 포도넝쿨 아래 꼬리만 살아 있는 개 한 마리 애기 시절 신내림이라도 받았는가 마주칠 적마다 엉덩이 요령을 흔들어댄다 인생이 동그라미가 맞아요, 원이 맞아요? 지랄허네 푸성귀나 뽑아다 처먹어 할머니도 저와 인연인가요? 이년? 아마존 강보다 긴 고무호스 끌고 나와 무당 할머니 아침을 시원스레 물 뿜으신다 텃밭의 장배기가 올..

여덟 通 2021.10.18

얼음 조각 - 이규리

얼음 조각 - 이규리 축제는 축제를 견디려 종일 서 있었다 잠시 그들의 일부가 되어주기로 하였으므로 음악이 흐르고 불빛이 내리고 오늘 나는 잘 죽어야 한다 하루를 사는 일 이건 녹지 않으려 안간힘 쓰던 저들 삶과 얼마나 다를까 잠시를 영원으로 아는 눈먼 사람 말이네 모든 날들인 하루 그래 하루라는 건 결코 허한 시간이 아닌 거야 부재하고 싶었어 멸하고 싶었어 저 실상으로부터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프고 목이 가늘어지지만 나는 서서히 사라져야 한다 어떻게 죽는 방식이 사는 이유가 되었니 카펫을 적시며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적막을 투명하다는 건 힘이 될 수 없지만 어떤 패도 지킬 수가 없지만 버티어온 힘으로 그러니 다시 고쳐서 말해보자 죽음이 이미 거기 있었으므로, *시집/ 당신은 첫눈입니까/ 문학동네 그리고 ..

한줄 詩 2021.10.17

달과 전봇대와 나 - 정철훈

달과 전봇대와 나 - 정철훈 도시는 빌딩마다 달이 켜져 있으니 그게 달인지 심통 맞은 알약인지 모르겠다 지금 눈에 보이는 달은 소화가 되지 않는다 달도 차면 기운다는 말이 소화제라면 모를까 달이 전봇대 끝에 일직선으로 떠 있다 끝은 위태로워서 달도 위태롭다 달이 전봇대에 왔을 뿐 전봇대가 달에게 갈 리 없다 달이 위험하다 전봇대도 위험하다 둘 다 서로의 끝이므로 달이 전봇대 끝에 매달린 벌레집 같다 벌레집을 누가 파먹고 있다 달이 뜨지 않는 날이 몇 번 있었다 그럴 때면 내가 달이 되고 싶었다 일직선으로 가능한 게 있다면 달과 전봇대와 나였다 나는 그렇게 견딘다 먼지가 되기 위해 나에게 닿기 위해 *시집/ 가만히 깨어나 혼자/ 도서출판 b 그곳과 이곳 - 정철훈 내가 귀촌을 미루는 것은 그곳에서 노동을 ..

한줄 詩 2021.10.17

아버지의 첫 직업은 머슴이었다 - 한대웅

어떤 소설보다도 흥미롭게 읽었다. 1941년 생 아버지의 일생을 1969년 생인 아들이 기록한 책이다. 아버지의 구술을 아들이 받아 적어 책으로 낸 것이다. 평범한 한 아버지의 일생이 어떤 위인전보다 값지게 읽혔다. 내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기에 더욱 생소하면서 흥미로웠을 것이다. 내 생일과 아버지 기일은 며칠 차이가 나니 않을 정도로 나는 간신히 유복자를 면했다. 나는 애틋한 자식이 아니라 젊은 어머니의 재혼길을 막은 불효자였다. 어렸을 때 친구 아버지는 술만 마시면 살림을 부수고 처자식을 때렸다. 그럴 때마다 온 가족이 뿔뿔히 흩어져 동네 남의 집으로 피신을 했다. 친구는 늘 한참 떨어진 우리집으로 숨어들었다. 한참 후 잠잠해지면 돌아가기도 했지만 대부분 우리집에서 자고 갔다. 그때 "저 새..

네줄 冊 2021.1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