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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숙 - 이강산 사진전

이강산 사진전을 보고 왔다. 코로나로 전시장 나들이도 부담스러운데 이 전시는 놓칠 수 없었다. 그동안 여러 번 전시회를 열었지만 이강산 사진전 관람은 처음이다. 사진가보다 시인으로 알고 있었기에 그의 사진 열정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그는 시집을 네 권이나 낸 중견 시인이면서 이제는 어엿한 사진가로 자리 매김을 했다. 이번 전시에서 다큐 사진의 진수를 봤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 여인숙을 오랜 기간 찍어 온 귀한 작업이다. 이제 그를 시인보다 작가로 불러야 할 것이다. 뭐든 새것이 우선이고 화려하고 뽀시시한 것이 좋다는 세상이다. 이제 여인숙은 여행가와 나그네의 고단한 다리를 쉬게 했던 숙박업소가 아니다. 바닥으로 밀려난 사람들의 마지막 주거 공간이거나 저렴하게 욕구를 풀 수 있는 성..

여덟 通 2021.10.30

죽는 것도 개운할 때 - 이성배

죽는 것도 개운할 때 - 이성배 들깨 송이가 까맣게 익는 사이 산도 사람도 까슬까슬해졌다. 풋내 나던 봄과 뜨거웠던 여름은 뒤란 항아리 속에서 더디게 익는 중이고 잘 말린 고추는 자식들 수만큼 나누어 놓았고 늙은 호박은 나눠줄 식구들보다 넉넉하다. 농사는 모자란 것도 남는 것도 없지만 다행히 곧 겨울이 올 것이다. 골목에서 마주친 노인들은 서로 자기 집으로 저녁 가자며 소매를 잡는다. 그만하면, 이만하면 되었지 뭐. 이맘때는 죽는 것도 개운하다. *시집/ 이 골목은 만만한 곳이 아니다/ 고두미 소일거리 - 이성배 회관 앞 평상에 마을 노인들 나와 있다. 며칠 전부터 슬몃슬몃 다음 계절이 비치던 자리 진한 자줏빛 꽃잎 여러 폭 두른 목단꽃 새초롬하니 노르스름한 애기똥풀꽃 아직도 서럽고 서러운 꽃며느리밥풀 ..

한줄 詩 2021.10.28

국수 - 강건늘

국수 - 강건늘 퇴근길 가랑비와 함께 흐느적거리며 걷는다 가난한 아버지들의 구부정한 어깨를 하고 비처럼 한쪽 어깨는 사선으로 기울고 시한부 진단을 받고 나오는 사람처럼 헐거운 양복 헐거운 우산 헐거운 버스에 겨우 오른다 뾰족구두가 꾸욱 발을 밟고 지나간다 미안하단 말도 없이 언제나 그렇듯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그러거나 말거나 기둥 하나를 겨우 잡고 모든 걸 그만두고 싶은데 그럼 어쩌나 무얼 해서 먹고 사나 부모님 얼굴은 어찌 보나 그럼 어쩌나 그럼 어쩌나 집에 오자마자 쓰러져 잠이 드는데 한 시간쯤 자고 일어나니 허기는 찾아와 국수를 끓인다 하얀 소면이 끓고 착하디착한 연약한 국수를 따듯한 국물에 말아 후룩 후룩 후루루 후루루 아 기운이 좀 난다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조금은 더 견딜 수 있을 것 같다 ..

한줄 詩 2021.10.28

나의 마지막 가을 - 황동규

나의 마지막 가을 - 황동규 이름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조그만 산골 절터, 내가 마지막 가을을 보낼 곳은 여기다. 성긴 풀밭에 검은 주춧돌들 아무렇지 않게 뒹굴고 각자 자기 곡선 그리며 내린 낙엽들이 잔바람에 이 구석에 몰렸다 저 구석에 몰렸다 하는 빈터. 산새 하나 부리가 시린 듯 짧게 짧게 울다 말다 한다. 적막(寂寞) 같은 건 없다. 늦가을 저녁, 남은 햇빛 속에 우박이 와르르 풀밭에 튕기며 환하게 내리고 이 빠진 가사로 옛 노래 흥얼대다 우박 맞고 얼얼해져 어디에 와 있는지도 모르게 되는 곳.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이제 어디로 가는지, 굳이 물으시겠는가 *시집/ 오늘 하루만이라도/ 문학과지성 화양계곡의 아침 - 황동규 지난밤 여러 사람과 꽤 마셔댔으니 말빚 많이 졌겠지 자갈들이 서로 살갗 ..

한줄 詩 2021.10.28

도망가자, 깨끗한 집으로 - 신우리

책 제목만 보면 어떤 류의 책인지 다소 애매하다. 알고 보니 미니멀리즘을 실천하는 책이다. 적게 갖고 적게 쓰는 것이 환경을 살리는 길임을 알려준다. 저자가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나처럼 한번 손에 쥐면 놓지 않는 욕심쟁이였다. 저자는 두 아이의 엄마다. 산후우울증으로 혼란을 겪던 중, 밤마다 쇼핑몰을 찾아 주문하는 것으로 욕망을 풀었다. 집안에 가득 들어찬 물건들 때문에 창문을 가릴 정도다. 어느 날 짐더미에서 탈출하기로 마음 먹고 비우는 삶을 실천한다. 이제서야 왜 책 제목이 인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짐으로 가득 찬 거실뿐 아니라 현관, 주방, 장롱, 베란다까지 어떻게 비우고 정리해서 미니멀리즘을 실천할 수 있었는지 꼼꼼하게 알려준다. 모든 걸 다 따라할 수는 없더라도 저자의 실천 중에 절반만..

네줄 冊 2021.10.27

마음을 담는다 - 정세훈

마음을 담는다 - 정세훈 곡기를 끊은 지 나흘 된 애완 노견 몽실이가 내 눈에 무언의 제 눈을 맞춘다 하루 종일 눈을 감고 사경을 헤매다가 간혹 나를 바라보며 가깝고도 머나먼 눈을 고요히 맞춘다 사랑했다고 사랑한다고 그리고 죽어서도 살아 사랑하겠다고 모든 생 마치고 가는 눈물 젖은 늙은 눈동자 그 어느 팔팔했을 적 총명했던 눈망울보다 더 뜨거운 눈 맞춤으로 물 한 방울조차 거부하는 주검의 길 가는 그 길을 그저 바라만 볼 수 밖에 없는 나의 마음을 고이, 담는다 *시집/ 동면/ 도서출판 b 가을 아침 - 정세훈 그리운 사람이 그리운 가을 아침 새벽 일터로 나가기 위해 아침 때 이른 신을 신는다 어느새 꼿꼿하던 내 등은 굽었다 신도 등이 굽듯 낡았다 등을 구부리지 않고 꼿꼿하게 편 채로 신을 탁탁 꺾어 신..

한줄 詩 2021.10.27

검은 외투를 입은 나방처럼 - 김윤환

검은 외투를 입은 나방처럼 - 김윤환 노을을 슬퍼하는 진짜 이유는 잔광(殘光)이 동굴을 향해 들어가는 어린아이의 눈동자처럼 보였기 때문이야 맑고 푸른 아침을 내 것처럼 으스대지 말 걸 그랬어 오후가 가까울수록 쓸쓸한 시간 꽃은 지고 향기도 말라 아무 것도 건져 올 수 없는 이승의 벌판 꽃술에 취해 반복되는 노을이 마침내 동굴에 자리를 편다 산 채로 불붙어가는 흰 나방의 꿈 하늘의 별이 아니라 어둠의 별이 되고 싶었지 동굴의 눈(眼)이 되고 싶었지 마치 검은 외투를 입은 나방처럼 *시집/ 내가 누군가를 지우는 동안/ 모악 이석증(耳石症) - 김윤환 뿌리 없는 돌 하나 귀청에 들어와 발걸음 뗄 때마다 세상을 흔드는데 아침 새소리나 나비의 날갯소리를 듣고자 했던 고요는 사라지고 막혀버린 출구 분주한 고함소리에..

한줄 詩 2021.10.27

나무라기엔 늦은 - 김진규

나무라기엔 늦은 - 김진규 그늘이 흩어지는 소리를 듣는다 나무 밑에 앉아 나뭇잎들을 바라본다 이 계절을 떠나는 것들은 모두 소리가 있어 한번이라도 귓가에 머문 것들은 쓸어담을 수도 없이 어딘가에 쌓여간다 햇빛은 수많은 시간을 지나고 지나서 내 발 언저리에 구르는 얼룩이 된다 이끼가 돋은 나무를 타고 오르는 개미떼 저것들은 언젠가 자신에게도 돋아날 죽음의 징후들을 알고 있을까 이를테면 맞대고 살아온 시간의 색을 푸른 것도 아닌, 검은 것도 아닌 그저 살색이라고 말하는 내가 개미떼를 바라본다 문득 아비의 피부가 떠오르지 않는다 나와 아비의 사이를 통과하는 바람 나는 단지 예감할 뿐이다 그가 누리던 수많은 시간과 이야기들 그 모든 걸 나르던 바람을 나는 만난 적 있던가 이따금 이명처럼 찾아오는 밤을 견디다가 ..

한줄 詩 2021.10.27

음악이 있다면 영원히 - 정경훈

음악이 있다면 영원히 - 정경훈 그렇게나 예뻤던 가을에 낙엽처럼 울상이었던 사람 두르지 못한 살을 그리워하는 그 사람, 뼈만 걸치고는 춤을 춘다 그 사람이 이 사람이다 이 사람이 그를 아끼고, 굵다가 앙상해진 어깨를 타고, 흘러 흘러 세계는 동질이 된다 그는 오래 삭힌 홍어를 씹으며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나는 짧게 들은 콧노래와 융합되어 그의 음악을 삼킨다 가을의 독서가 일제의 잔재라면 가을의 음악은 무엇의 제국이란 말인가 무엇의 의미를 찾다가 울상으로부터 일그러진다 낙엽의 짓거리는 파동이, 그 사람을 애쓰게 한다 *시집/ 아름답고 우아하기 짝이 없는/ 문학의전당 마로니에 공원 - 정경훈 비둘기가 고개를 둘러대고 있다 누군가가 어깨를 툭 치고 그렇게 뒤를 돌아보면 비둘기는 백색이었다 날아오른다 말끔하게 바..

한줄 詩 2021.10.26

징검다리 버튼 - 김영진

징검다리 버튼 - 김영진 ​ 소식 알 길 없던 이와 다시 만나 걸으니 마음도 붉다 어금니 앙다문 날 많아 꺾인 사랑 잊은 지 오래 새로운 일이 느티나무 잎만큼 무성히 자랐다 안부 물을 일 없이 지내온 삶 그러다 오늘, 서로 배낭 멘 채 약속이라도 한 듯 마주쳤다 "시간 흘러도 그대로네"로 시작한 이야기, 말이 오솔길 따라 오르내렸다 다른 길 지나왔어도 물길은 서로 만나고 그때로 돌아갈 일 없어도 지나갈 다리 놓을 때 있다 계곡 저편으로 건널 징검다리 시선 둔 채 흔들리는 가지처럼 잠시 서성였다 발 디디면 현실로 돌아가는 저 돌다리 버튼, 우리보다 노을이 먼저 밟고 지나갔다 *시집/ 영구임대아파트 입주 문의/ 문학의전당 곱으로 갚아줄 궁리하다가 - 김영진 ​ 넌 모자라다는 말 수화기 건너왔다 힘껏 살아온 ..

한줄 詩 2021.1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