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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오는 점성 - 정철훈

멀리서 오는 점성 - 정철훈 오늘은 길을 걷다가 허공을 향해 눈을 부릅떠보았다 아주 먼 허공이 아니라 머리에서 한 뼘 위 허공 그러면 내 눈에 습기가 엉켜 드는 것이다 나는 습기가 아주 먼 곳에서 왔다는 것을 안다 내가 기다리는 건 어떤 점성일 게다 멀리서 오는 점성 어제는 친구와 술을 마시며 왜 한 번도 길을 잃어버린 적이 없냐는 말을 들었다 통렬함이 없다는 말도 들었다 그건 좀체 자세를 흩뜨리지 않는 내 소시민적 기질을 두고 하는 말이다 나에겐 울부짖음이 없고 남루가 없고 방황이 없고 상실이 없고 비에 젖은 무의식의 비애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건 모두 눈물과 관련되어 있다 내가 기다리는 건 멀리서 오는 점성이고 남들은 그런 나의 기다림을 모른다 그럴지도 모른다 *시집/ 가만히 깨어나 혼자/ 도서출판 b..

한줄 詩 2021.11.06

단풍의 부탁 - 박인식

단풍의 부탁 - 박인식 당신의 자리는 나를 사이에 둔 해의 맞은편이었으면 해 해와 당신 사이에 내가 설 수 있도록 그러니까 나는 햇살 광배로 나를 바라보는 당신에게 스며들었으면 해 바깥에서는 다 지워진 벽화 얼룩 같아도 태초의 말씀을 태초의 빛과 색으로 성당 안에 쏟아붓고 있는 스테인드글라스처럼 당신의 기억을 예언으로 바꿔 환히 비춰줬으면 해 어느날의 해는 한없이 투명에 가깝도록 빨갛게 나를 통과해서 당신의 심장으로 불타올랐으면 해 *시집/ 언어물리학개론/ 여름언덕 어느 늦가을 저녁 - 박인식 나이값에 실패하고 용서에도 실패하고 새벽까지 혼자 마신 술에게도 실패하고 오래된 동네 늙은 뒷골목을 어슬렁거리다 돌아온 전생의 방 언제 어디를 끌고 다녔는지 기억나지 않은 캐리어 위 아무런 그리움도 남아 있지 않아..

한줄 詩 2021.11.06

베두인의 물방울 - 우대식 시집

예전에 라는 책을 감명 깊게 읽은 적이 있다. 그 책을 읽고 저자인 우대식 시인을 알았다. 한때는 기형도의 시를 달달 외울 정도로 밤을 새며 읽었다. 대부분 골백 번씩 읽었을 것이다. 여림 시인도 마찬가지다, 그의 유고 시집을 오랜 기간 옆에 두고 읽었다. 이연주와 신기섭 시인도 자주 들추는 시집이었다. 우대식은 12명의 요절 시인을 그만의 맛깔스런 문장으로 애도했다. 마음에 담고 있던 시인을 다시 소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때부터 우대식 시집을 찾아 읽었다. 생각보다 시집이 많지 않았다. 그가 낸 세 권의 시집 중 과 두 권을 읽었다. 시에 공감이 가면 시인의 약력이 궁금해지는 법, 그때 시인은 평택의 한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이번에 나온 은 오랜 만에 나온 그의 네 번째 시집이다. 1..

네줄 冊 2021.11.06

사문진, 내 어깨에 껌이 - 이자규

사문진, 내 어깨에 껌이 - 이자규 붉은 술 아껴 넘길 때마다 비릿한 서쪽이 부풀어갔다 바람자락이 억새들을 방죽으로 쓸어 뉘었을 때 연지 찍은 황혼이 취한 노을을 안았다 멀리 맨몸의 두물머리에서 낙동과 금호가 몸을 합쳤는데 물새 발자국 형상의 수면 위로 저 산과 이 강의 무궁함이 자연의 차오르고 기울어짐의 노래라서 바람 재운 물속 용이 춤을 추면 견우성과 남두성이 손짓해 선상은 이미 신선인 양 차오르는 달이라서 우리는 계수나무 노와 모란 상앗대를 잡았다 기타 퉁기는 키다리 묵객은 적벽가를 읊어대는데 우리 삶이 그저 슬퍼하는 듯 호소하는 듯 백로가 강을 건너가는 일 피어오르는 꽃으로만 그득한 배가 단물을 씹고 있다 일몰 읽은 취기는 강기슭 휘어지는 억새들 때문 누군가 당분 빠진 하현달을 내 어깨에 던졌다 ..

한줄 詩 2021.11.05

백 년 여관 - 박주하

백 년 여관 - 박주하 백 년 닳은 문턱에 노란 은행잎 한 장이 내려와 묻는다 잘 지내니? 별빛 돋았던 흔적도 낭랑하게 첨부한 뒷심 깊은 안부를 받으니 침묵에도 한계가 온다 우연을 꺾고 싶은 결심마저 도진다 하지만 어긋난 폐허를 더듬어서 어쩌겠는가 잘 지내지는 못했으나 이젠 무엇이 그리 잘 사는 것인지 답할 일도 아니어서 그저 간절히 묵었던 무덤 같은 방에 들어 백 년 전에 넘어진 구름의 까닭이나 탐한다 늦가을을 풀어 더는 익지 않는 모과 한 알의 사정을 창에 어리는 물방울에 찍어 벽에 기록하는 것이 솔직한 나의 전부, 다만 침묵의 충만함을 뭉쳐서 백 년 후에 다시 찾아들 그림자를 무심히 닦아 허공에 걸어 둘 뿐 *시집/ 없는 꿈을 꾸지 않으려고/ 걷는사람 심심한 날 - 박주하 감나무 한 그루가 유일한 ..

한줄 詩 2021.11.05

연극 - 이순재의 리어왕

코로나로 오랜 기간 공연장엘 가지 못했다. 첫 번째 공연장 나들이가 연극 리어왕이다. 조기예매 티켓으로 30% 할인 가격으로 봤다. 프리뷰 공연은 40% 할인이었는데 경쟁이 치열해서 구하지 못했다. 그래도 제일 싼 등급이지만 일찍 서둘러 구입이 가능했다. 표 구하고 나서 며칠 후에 공연일이 한참 남았는데도 이미 전석 매진 소식에 일찍 일어난 새가 좋은 먹이 구한다는 말을 실감했다. 리어왕은 세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로 그중에서도 가장 비극적인 작품이다. 오래 전에 리어왕을 본 기억이 있는데 누가 리어왕을 했는지 배우 이름이 생각이 안 난다. 이번 공연은 포스터에서부터 이순재의 리어왕이다. 87세의 나이에 리어왕을 한다는 게 대단하다. 더구나 이번 리어왕은 각색을 하지 않아 공연시간이 3시간이 넘는다..

여덟 通 2021.11.05

아흔아홉 개의 표지판이 있는 길 - 최준

아흔아홉 개의 표지판이 있는 길 - 최준 그 울보, 당나귀를 몰고 가고 싶었지만 할아버지가 먼저 데리고 갔지 비가 내렸다고도 하고 눈이 내렸다고도 하는데 길 나선 할아버지는 당나귀만 끌고 가다 집과 애인을 잃어버리고 어린 당나귀처럼 길 위에서 울었다고도 하는데 눈물이 길을 다 적셨다는데 알고 보니 이건 다 가로수가 지어낸 얘기 심심한 바람이 들려준 유머 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지 그렇게 지나왔다고 내가 말하면 거짓말이지 당나귀를 끌고 애인을 잃어버리고 집 나가 울던 할아버지는 대체 어디로 간 거야, 하고 마차 바퀴에게 묻는다면 그건 길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가로수는 나 지나갈 적에 이미 서 있었던 것 바람은 처음부터 길 잃었던 것 하므로, 누가 알까 이 길로 대체 몇 개의 슬픔과 절망과 욕설이 지..

한줄 詩 2021.11.03

그네의 목적 - 김가령

그네의 목적 - 김가령 그네가 흔들릴 때마다 호주머니 안에 소리가 쌓인다 그러니까 그네는 삐걱거리는 소리의 힘으로 나를 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언덕 너머 네가 보인다 다시 안 보인다 나는 더 높이 나를 보낸다 너는 여전히 등뿐이다 나를 밀고 있던 모든 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네는 왜 일인용만 고집할까 흔들 일 없는 그대와 그네 사이가 너무 멀다 가벼운 리듬이 손목 끝에서 멀어지고 처음과 끝의 주기가 빨라 진다 풍경들이 나를 가두기 시작한다 나는 매번 같은 얼굴인데 너는 항상 같은 태도다 오래 품고 있던 노래 한 소절이 허밍으로 흐른다 가사의 주인공은 매번 너지만 한 번도 나타나지 않는다 나의 불안이 대척점을 그대로 품는다 원심력은 끝까지 나를 뱉어낼 생각이 없는데, 풍경이 와락 달려든다 이제는 어둠이 ..

한줄 詩 2021.11.03

완장 - 이강산

완장 - 이강산 그 가을, 나는 모과 도둑으로 살았다 어느 외딴집의 모과에 콩깍지가 씌었던 것이다 두어 차례 모과나무 곁에서 집을 향해 인기척을 냈지만 감감무소식이었다 문틈으로 누워있는 노파가 보였을 뿐이다 나는 노파를 못 본 척, 모과 둘을 땄다 모과의 색에 빠져 남자가 다가서는 줄 몰랐다 모과 나무에게 다소곳이 모과를 돌려주고, 남자의 완장을 덥석 받아 들고, 나는 이듬해 가을쯤 완장을 벗을 줄 알았다 가을에 모과나무는 베어지고 없었다 모과의 사타구니에 욕창이 생기도록 따지도, 줍지도 않던 남자였다 노파의 닫힌 문처럼 모과나무를 벤 까닭이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나처럼 완장을 찬 사람이거나 아예 모과를 알아보지 못하는 어떤 절명의 칼날이 모과나무를 쓰러뜨렸을 것이다 남자 몰래 불온한 상상만 했다 *시..

한줄 詩 2021.11.02

참회록 - 김왕노

참회록 - 김왕노 나는 나와 관계없다 외면해 버린 모든 것에 용서를 비는 참회의 문장이다. 내가 꽃에 수평선에 구름에 개울에 소홀했던 것 관심 밖에 둔 만큼 내가 관심 밖으로 밀려났던 것을 내 몫이라 자청하며 내게 밀려드는 샛강에서 피어난 자욱한 안개도 몰랐다. 나를 찾아왔다가 내 부재로 사라져 간 지붕 위에 떨어진 빗방울 내가 밑줄 그어야 할 세상의 모든 진실한 문장도 몰랐다. 그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문외한인 내게 있다는 것을 배꽃 분분히 휘날리는 밤에 단지로 일 획의 혈서를 쓰고 싶구나. 관점 하나만 바꿔도 모든 것이 달라져 보인다는 세상 내가 세상 밖으로 밀려난 것은 내가 세상 중심을 밀쳤던 것 무엇을 버린다면 내가 무엇으로부터 버려진다는 것을 뭔가 버리거나 소비했으므로 내가 여기 이른 것을 ..

한줄 詩 2021.1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