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검은 외투를 입은 나방처럼 - 김윤환

마루안 2021. 10. 27. 22:00

 

 

검은 외투를 입은 나방처럼 - 김윤환


노을을 슬퍼하는 진짜 이유는
잔광(殘光)이 동굴을 향해 들어가는

어린아이의 눈동자처럼 보였기 때문이야

맑고 푸른 아침을
내 것처럼 으스대지 말 걸 그랬어
오후가 가까울수록 쓸쓸한 시간
꽃은 지고 향기도 말라
아무 것도 건져 올 수 없는
이승의 벌판

꽃술에 취해
반복되는 노을이
마침내 동굴에 자리를 편다
산 채로 불붙어가는
흰 나방의 꿈

하늘의 별이 아니라
어둠의 별이 되고 싶었지
동굴의 눈(眼)이 되고 싶었지
마치 검은 외투를 입은 나방처럼


*시집/ 내가 누군가를 지우는 동안/ 모악

 

 

 

 

 

 

이석증(耳石症) - 김윤환

 

 

뿌리 없는 돌 하나

귀청에 들어와

발걸음 뗄 때마다

세상을 흔드는데

 

아침 새소리나

나비의 날갯소리를

듣고자 했던

고요는 사라지고

 

막혀버린 출구

분주한 고함소리에

귀먹고 눈멀었지

 

반백 년 지나서야

죽은 돌 하나

치우고 싶었네

 

어지러움 걷어내고

빈 고막에

따뜻한 돌 하나

들이고 싶네

 

공명(共鳴)한

산돌 하나

내 안에 옮기고 싶네

 

 

 

 

 

*시인의 말

 

티끌만큼이나 가볍고

별만큼이나 아득한 기억을 붙잡고

매달리다가 마침내 그 풍경을

지우기 위해 시를 써왔다

 

점점 사라지는 어머니를 붙들고

주저앉아 우는 아이

시는 숨어서 울 수 있는 골목

나는 지금 다섯 살에 도착해 있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의 마지막 가을 - 황동규  (0) 2021.10.28
마음을 담는다 - 정세훈  (0) 2021.10.27
나무라기엔 늦은 - 김진규  (0) 2021.10.27
음악이 있다면 영원히 - 정경훈  (0) 2021.10.26
징검다리 버튼 - 김영진  (0) 2021.1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