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국수 - 강건늘

마루안 2021. 10. 28. 22:18

 

 

국수 - 강건늘


퇴근길
가랑비와 함께 흐느적거리며 걷는다
가난한 아버지들의 구부정한 어깨를 하고
비처럼 한쪽 어깨는 사선으로 기울고
시한부 진단을 받고 나오는 사람처럼

헐거운 양복 헐거운 우산
헐거운 버스에 겨우 오른다
뾰족구두가 꾸욱
발을 밟고 지나간다
미안하단 말도 없이
언제나 그렇듯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그러거나 말거나
기둥 하나를 겨우 잡고
모든 걸 그만두고 싶은데
그럼 어쩌나
무얼 해서 먹고 사나
부모님 얼굴은 어찌 보나
그럼 어쩌나
그럼 어쩌나

집에 오자마자 쓰러져 잠이 드는데
한 시간쯤 자고 일어나니 허기는 찾아와
국수를 끓인다
하얀 소면이 끓고
착하디착한 연약한 국수를
따듯한 국물에 말아
후룩 후룩
후루루 후루루


기운이 좀 난다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조금은 더 견딜 수 있을 것 같다

흐물흐물한 국수 가락이
나를 일으킨다


*시집/ 잠만 자는 방 있습니다/ 달아실

 

 

 

 

 

 

잠만자는방있읍니다 - 강건늘 


골목길 안 초록색 대문
'잠만자는방있읍니다'
추위에 떨며 한데 모여 있는 글자들
'습'의 옛 추억인 '읍'을 간직한 채,
잠만, 오로지 잠만
아침부터 밤까지
씻고 먹고 생각하기도 거부하고
오직 잠만 자야 하는 방

잠을 깨울까 조심스럽게 낮은 도 음으로 문을 두드린다
집주인은 병명을 모르는 병자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빛을 등지고 있는 어둑한 정원
푸름을 잃은 줄기와 잎들
작은 새들은 노래를 부르지 않고
도도한 척하면서도 불안을 숨기고 있는 고양이는
깊은 숙면을 취하고 있다

말 그대로 잠만 자는 방이지요 잠 이외에 어떤 것도 해서는 안 됩니다 주제 없는 장편의 근심이나 슬픔 따위로 습기가 차서 곰팡이라도 생기거나 방이 무거워져 균열이라도 생기거나 하면 곤란하지요 그리고 되도록이면 친구나 티비 컴퓨터 핸드폰은 피해주세요 당신을 더욱 외롭게 만들 뿐이니까요 이 방은 오로지 잠만 자는 방입니다 그래서 방세도 싸지요 대신 방음과 빛 차단은 확실히 해드립니다 보세요 단단하고 견고한 벽이지요
주인의 입에서는 오래된 눅눅한 낙엽 냄새가 났다

거실 벽 중앙에는
'잠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 강건늘 시인은 1978년 경기도 포천 출생으로 서강대 국문과를 졸업했고 2016년 <시인동네>로 등단했다. <잠만 자는 방 있습니다>가 첫 시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