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나의 마지막 가을 - 황동규

마루안 2021. 10. 28. 22:05

 

 

나의 마지막 가을 - 황동규


이름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조그만 산골 절터,
내가 마지막 가을을 보낼 곳은 여기다.

성긴 풀밭에 검은 주춧돌들 아무렇지 않게 뒹굴고
각자 자기 곡선 그리며 내린 낙엽들이
잔바람에 이 구석에 몰렸다
저 구석에 몰렸다 하는 빈터.
산새 하나 부리가 시린 듯
짧게 짧게 울다 말다 한다.
적막(寂寞) 같은 건 없다.
늦가을 저녁, 남은 햇빛 속에
우박이 와르르 풀밭에 튕기며 환하게 내리고
이 빠진 가사로 옛 노래 흥얼대다 우박 맞고 얼얼해져
어디에 와 있는지도 모르게 되는 곳.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이제 어디로 가는지,
굳이 물으시겠는가


*시집/ 오늘 하루만이라도/ 문학과지성

 

 

 



화양계곡의 아침 - 황동규


지난밤 여러 사람과 꽤 마셔댔으니
말빚 많이 졌겠지
자갈들이 서로 살갗 살살 간질이는 새벽 물소리
잠이 종잇장처럼 가벼워진다.
펜션 빠져나와 물가에 선다.
이게 몇 개월만인가?
여기저기서 물안개들 피어올라
안개구름 되어
산과 산 사이로 올라가 몸을 감춘다.
골짜기들 품이 생각보다 넉넉하군.
바로 눈앞 물 위에서 이리저리 달리는 저놈은?
아 소금쟁이, 내 정신보다 더 가볍고 빠르네.
군더더기가 없다.
산새 하나가 풍경(風景) 밖으로 나와
이리 와유 이리 와유 하며 뛰어다닌다.
이런 곳이라면
진 빚 못다 갚고 세상 뜨더라도
가볍고 밝은 잠 하나쯤 데불고 갈 수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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