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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절기 - 피재현

환절기 - 피재현 어제는 늦은 가을비가 종일 내리고 밤에는 바람도 거세게 불어 나는 조금 쓸쓸했다 바람이 동네 골목이며 나뭇가지 사이를 지나가면서 내지르는 소리는 이별한 사람들의 부음 같아서 그냥 나도 모르게 허공을 바라보고 앉아 그 사람의 명복을 빌어 보게 되는 것이다 바람은 아침까지도 제법 불었는지 문밖에 나서는 걸음이 어설펐는데 나뭇잎들이 하룻밤 사이에 다 떨어지고 빈 가지들이 나보다 더 쓸쓸하게 서 있었다 그중 마로니에는 큰 잎들로 가려졌던 앙크란 맨몸을 다 드러내고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는데 나도 황급히 눈을 돌리고야 말았다 주인 객 할 것 없이 사람만 보면 무턱대고 짖어대던 앞집 개도 딴 데로 돌아앉아 있었다 가을인가 싶더니 단풍 구경 한번 못 하고 겨울이 왔구나 나목들이 긴 겨울을 저렇게 ..

한줄 詩 2021.11.11

만성 계절앓이 - 권영옥

만성 계절앓이 - 권영옥 찬 기운을 맞은 단풍나무 위에 바람이 또 분다 잎들이 바람에 반항하는 사이 또 다른 잎들은 고통에서 벗어나 찬 숨을 내쉰다 보다 못한 화가가 나뭇잎 뒤편에다 솜털을 그려 넣고 양초를 문질러 붉은빛을 내린다 빛에 수장된 이파리들은 첫 항해를 하고 난 배처럼 붉어지고 뚱뚱해진다 나무 꼭대기에서부터 흘러내린 빛은 몸통에 이르자 강렬하게 빛나고 빛난다 어느 고통도 헛된 것이 없어 줄기 속에서도 굳은살이 박이지만 내겐 찰진 붉음이 찾아왔을 법도 한데 없다 퇴락의 끝을 몰랐다 맨땅에 머리 박는 일이며 긁어모아 붉은빛을 훔쳐가는 이도 있었다 바람이 단풍잎을 떨어뜨리며 날아간다 화가의 발색효과, 늦가을의 색채들은 끔찍하다 *시집/ 모르는 영역/ 현대시학사 낡은 허기 - 권영옥 지하철 안내방송이..

한줄 詩 2021.11.11

혼자 사는 사람들 - 홍성은

간만에 잔잔하면서 울림이 있는 영화를 봤다. 온갖 욕설과 폭력, 그러면서도 너무나 비현실적인 영화들이 많은 작금의 현실에서 이런 영화는 보석처럼 빛난다. 2년 가까이 코로나로 극장 나들이가 소원했는데 이 영화로 위로를 받는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여성이 이끌어 가고 있다. 그녀의 이름은 유진아, 그는 자기에게 말을 걸지 않는 사람을 좋아한다. 신용카드 회사 고객 상담실에서 일한다. 사람을 대면하는 것이 아닌 오직 상담 전화로 소통하는 것이다. 회사 동료들과도 거의 대화를 하지 않는다. 오직 칸막이가 있는 자기 만의 공간에서 전화로 사람을 만날 뿐이다. 온갖 진상 고객들의 황당한 상담을 천연덕스럽게 받아넘기는 실력 덕분에 우수 사원 표창을 받는다. 진아가 어릴 때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갔던 아버지는 ..

세줄 映 2021.11.11

지지대는 박혀 있지만 - 이정희

지지대는 박혀 있지만 - 이정희 제대로 한 번 서 보겠다는 친구의 다짐에 날인을 했다 너무 쉬운 날인은 야반도주를 모르지만 가끔 이름을 꾹 눌러 놓고 절망의 궤도에 진입한 사람이 도망치는 일이 종종 있다 빗나간 으름장, 숨이 가쁜 독촉을 껴입었다 이파리가 늘어나는 만큼의 횟수로 빚을 대납했다 가을만 되면 앙상하게 드러나는 암전의 다발 남은 금액에 찬바람이 불었다 흔들려 보겠다던 친구는 무용지물의 이름으로 봄과 가을을 떠돌았다 포기와 체념을 허락할 수 없다는 듯 봄볕은 악착같이 이파리를 늘이며 찾아왔다 비 온 후의 날들처럼 이파리 싱싱한 나무를 키우느라 몇 년 동안을 다른 이름으로 살았다 건기의 씨앗처럼 어떤 싹도 피우지 못했다 세상에 굳건한 바람이 어디에 있나 질척거리는 긴 여름도 그럭저럭 지내다 보면 ..

한줄 詩 2021.11.10

헌 신발 - 박상봉

헌 신발 - 박상봉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네 살아온 날을 세어보니 기록할 만한 일도 없구나 청춘은 어디로 갔나 내가 세운 공장들은 어디에 있나 밤늦도록 눈 비비며 보던 책들 밑줄 그은 문장의 길 따라 지치도록 구름 위를 달려왔으나 끈이 너덜너덜해진 가방 속 세월을 낭비한 죄의 형량만 무겁네 직장생활 십팔 년 아무리 계산해 봐도 한 푼어치 남은 것 없는 밑지는 장사였네 내 집은 어디에 있나 문밖에서 여러 날 지내는 동안 돌아갈 집을 잊어버렸네 내 몸은 어디로 갔나 사람들이 자꾸 낯설어지네 불러낼 친구 하나 없는 저물녘에 발그레 술이 오른 노을과 마주 앉아 살아온 날의 뒤안길 돌아보니 뒤축이 닳은 헌 신발만 남았네 *시집/ 불탄 나무의 속삭임/ 곰곰나루 늦가을 단풍 - 박상봉 내 나이 어느덧 해가 ..

한줄 詩 2021.11.10

지구라서 다행이야 - 고태관

지구라서 다행이야 - 고태관 바닥을 껴안고 잠든다 홍대입구역 8번 출구로 올라가는 사람들 간혹 동전을 내려놓는다 돌아누운 그가 지구를 둘러맨다 반대편 대륙의 기린 긴 목에 매달린 머리를 가누려 뒷다리를 구부리고 자전이 멈춘 시간 가만히 펼쳐진 철새의 날개가 드리워진다 목적지를 찾는 부리의 여정 모빌이 되어 돌아온다 걸음마 내딛는 아이 계단 하나 오르고 안간힘 다해 휘청거린다 울음 열기 직전 각자 반짝거리던 별자리가 떨린다 도착한 철새를 올려다보다가 나뭇가지에 매달린 잎을 씹는 어린 기린 현기증으로 기울어진다 아이는 엄마 품에 안겨 떠난다 팔을 뻗어 동전을 모은다 지구라서 다행이야 *시집/ 네가 빌었던 소원이 나였으면/ 걷는사람 동그라미 - 고태관 웅크리면 따뜻하다 엎어 놓은 버스 바퀴를 탁자 삼아 버스기..

한줄 詩 2021.11.10

하류(下流)에서 - 김해동

하류(下流)에서 - 김해동 이부자락을 확 밀치자 새벽 으스름이 달려 나왔다 산의 어깨를 무등 타고 먹빛으로 덮이는 낮은 풍경들 텐트 속에서도 사랑은 집을 짓는다 거칠게 서 있는 도로 표지판 옆에 가을국화는 기꺼이 고개 숙이고 선회하는 물살 따라 모여드는 여름의 잔해들 보고도 못 본 척 집채만한 바위를 받치고 있는 주먹 돌 하나 그렇게 어디를 꼭 받쳐 들고 매년 치열하게 살아왔지만 우리들 삶이 처절하게 되지는 않기를 간절하게 파인 계곡 속으로 맴도는 너무 일찍 떨어진 나뭇잎 하나 *시집/ 칼을 갈아 주는 남자/ 순수문학 낙엽 - 김해동 숯불처럼 꺼져 가는 밤 거나하게 타오르던 열정 불꽃 속에 던져 버리고 이슬에 취한 몸 바람에 싣고 메마른 길을 나서야 한다 지난 세월의 그리움만 안고 가기에는 너무 그리워 ..

한줄 詩 2021.11.09

아버지의 죽음에선 박하 향기가 났다 - 홍성식

아버지의 죽음에선 박하 향기가 났다 - 홍성식 도둑담배를 피우러 간 병원 계단 실연한 동료를 안아주던 간호사와 눈이 마주쳤다 아버지는 여섯 달째 입원 중 녹슨 목련이 오래도록 나무를 붙들던 그해 봄은 지나치게 길었고 마약성 진통제로 견디는 노인 키가 큰 레지던트의 짧은 치마는 벚꽃 빛깔이다 아버지는 여섯 달째 입원 중 모래 섞인 바람이 창을 두드리면 흐린 눈망울이 여자의 다리를 훑고 백 년 같은 하루가 끝나가는 저물녘 녹두죽을 끓여온 엄마가 소변 주머니를 비운다 아버지는 여섯 달째 입원 중 손을 잡고 무슨 말인가를 하려면 모진 힘으로 뿌리치며 자꾸만 돌아눕고 샤워도 양치질도 잊은 지 오래 행여 숨이 끊겼을까 다가가 호흡을 확인한다 아버지는 여섯 달째 입원 중 다른 세상에서 묻혀온 냄새인 듯 머리칼과 목덜..

한줄 詩 2021.11.09

라면의 재발견 - 김정현, 한종수

라면을 좋아한다. 짜장면 곱배기를 후딱 해치울 정도로 10대는 물론 식탐이 심했던 20대까지만 해도 라면 두 봉지를 후딱 해치웠다. 지금은 소식을 하는 탓에 한 봉지도 부담스러울 때가 있다. 물론 아무것도 넣지 않고 라면만 끓이면 한 봉지가 딱이다. 나는 라면을 먹을 때 첨가물이 많다. 양배추, 양파, 멸치, 미역 등 몇 가지와 두부도 조금 넣어야 하고 불린 표고버섯 하나 아니면 양송이 두어 개 썰어 넣고 거기에 달걀까지 넣으면 웬만한 중국집 짬뽕 양이다. 내가 오뚜기 스넥면을 즐겨 먹는 이유도 면이 조금 적기 때문이다. 나는 매일은 아니어도 일주일에 서너 번은 라면을 먹는다. 희한하게도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는 것이 라면이다. 많이 먹으면 해롭다고도 하나 라면은 내가 가장 자주 먹는 영혼 음식이다. ..

네줄 冊 2021.11.09

불면(不眠) - 김용태

불면(不眠) - 김용태 언제부터였던가 도무지 가둘 수 없는 마음, 문득 잠 깨 더듬어 보니 이 밤 어디를 떠도는 것인지 그리도 일렀건만 혹여 절집 돌담 아래 쪼그리고 앉아 눈 맞추고 있는지, 꼬옥 끌어안고 꿈같은 잠이나 자고 있는지 예전의 일처럼 그 사랑에 버림받고 길모퉁이 돌아 울며 취해 있는지 아니면 이도 저도 지쳐, 그만 통도사 홍매화라도 보러 갔는지 누옥에 젖은 자리다만 늑골 안쪽 훤히 드러난 네 자리 스미듯 들어와, 그만 나를 재워다오 다시 새벽이다 *시집/ 여린히읗이나 반치음같이/ 오늘의문학사 여린히읗이나 반치음같이 - 김용태 ​ 살다 보면 때로는 잊는 것이 기억하는 것보다 더 어려울 때가 있나니 하물며 그것이 사랑의 일이라면, 사랑도 더러는 죄를 짓는 일이거니 당신과 나 철 늦은 사랑을 해서..

한줄 詩 2021.1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