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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에 풀씨 날아와 속절없이 번지고 - 하외숙

빈집에 풀씨 날아와 속절없이 번지고 - 하외숙 나이가 들면 눈썹도 떠나보내야 하는지 너무 오래 사는 게 아니냐며 한숨짓던 앞마당의 감나무 무성했던 아파리 대신 형체만 남아 무망한 노인 같다 굽어보는 풍경이 절경이라지만 슬레이트 지붕엔 풀씨 날아와 속절없이 번지고 깨진 장독엔 그렁그렁 낙숫물 고였는데 사립문짝은 어디로 달아나고 기울어진 기둥이 겨우 떠받치고 있는 늙은 집, 허물어진 돌담 너머로 저녁 햇살 비낀 먼 산 바라보며 자꾸만 흘러내리는 바지춤 추켜올리는 터주 감나무 한 번 떠난 사람은 훨훨 다시 돌아오지 못하네 *시집/ 그녀의 머릿속은 자주 그믐이었다/ 시와반시 수면과 불면 사이 - 하외숙 침실은 수면 아래 침몰한 한 척의 배 파도에 떠밀려 실종된 잠은 밤의 부유물 출구를 찾으려 해도 떠오르는 부표..

한줄 詩 2021.11.02

꽃다발 - 서수자

꽃다발 - 서수자 꽃다발을 들고 마로니에 공원을 걸어간다 백발이 걸어간다 쥐도 새도 모르게 남 같은 내가 걸어간다 남아 있는 회한도 없이 떠오르는 이름도 없이 텅 비어 있는 내 안에 한 다발의 꽃향기를 툭 던진다 비어 있어라 비어서 가득 차라 그 향그런 충만 날이 갈수록 더 사무칠 오늘의 나여,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가 뼈 마디마디 사리 같은 것만 가득하구나 강물에게 미안해, 미안해 동행해준 모든 길에게 고마워, 고마워 박수쳐주는 나에게 내가 꽃다발을 선사한다 우러러보는 마로니에나무와 은행나무들이 낙엽을 흩뿌리며 환호한다 찬바람에게 체온 한 벌을 벗어준다 또 한 벌을 벗어준다 예술인의 집은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시집/ 아주 낮은 소리/ 천년의시작 알리바이 - 서수자 구태여 말하라면 나는 내가 그리울 뿐..

한줄 詩 2021.11.02

나도 애국 한 번 - 김상출

나도 애국 한 번 - 김상출 어느 일본 영화에서 히치하이킹 하던 젊은 사내가 주인공인 중년 여인의 질문에 고향이 홋카이도라 한다 홋카이도 홋카이도 되뇌다 나도 사는 곳이 함경도 흥남 쪽이거나 평안도 신의주 부근에서 온 사람을 내 차에 태워봤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 목이 메었다 그러다가 또 초등학교 때 배운 우리나라 제일 추운 곳 중강진 그래 그 중강진 어디쯤에서 두툼한 솜옷 입고 감자를 굽거나 삼지연 맑은 물에 발 담그고 피라미 매운탕 안주 삼아 막걸리 추렴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이르자 막 눈물이 났다 왜 우리만 이래 하면서 혼자 씨바 씨바 하면서 한참을 울었다 *시집/ 다른 오늘/ 한티재 선(善)의 속성 - 김상출 120회 짜리 드라마를 위하여 선은 늘 고통 받아야 한다 악으로부터 괴..

한줄 詩 2021.11.01

자서전엔 있지만 일상엔 없는 인생 - 이현승

자서전엔 있지만 일상엔 없는 인생 - 이현승 딱히 무엇과 싸우지도 않았는데 이미 패배한 자의 발걸음으로 귀가한다. 패배의 기원은 가늠할 수 없음에 있는가 아니면 거스를 수 없음에 있는가. 퇴각의 핵심은 손실을 줄이는 데 있으니 오늘의 패배는 구태여 찬비를 맞지 않는 데 핵심이 있건만 세월 앞에는 장사가 없어서 밤새 세월이 새끼손가락쯤으로 들어올려서 패대기를 쳤는지 잔뜩 두들겨맞은 몸으로 잠 깨는 아침 멍한 정신으로 눈곱을 수습하고 보니 아 돌아오지 않는 활력이여 정신과 기운은 어디 가 아직 돌아오지 않는가. 어서 와라 활력이여 최선을 다해 제자리로 오는 사람은 깜빡 졸다가 하차할 역을 놓친 승객이고 가지고 있는 것을 놓쳤던 사람이니 허둥지둥 세월보다 힘센 책망감에 내몰려 제자리에 돌아와 보면, 그는 늙고..

한줄 詩 2021.11.01

대답이고 부탁인 말 - 이현승 시집

진공청소기에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흡인력 있게 읽히는 시집이다. 지루증 환자처럼 웬만한 시집에는 감흥이 없거나 좀처럼 감탄하지 못하는 편인데 이 시집은 드물 게 예외다. 아직 두 달쯤 남았지만 아마도 내가 정한 올해의 시집이 될 듯싶다. 해마다 연말이면 나름의 규칙이 있다. 한 해에 본 영화와 시집을 나열해 보면서 나 혼자만의 시상(施賞)을 하는 것이다. 코로나 때문에 영화 보기는 많이 줄었으나 읽은 시집 숫자는 늘었다. 보통 5권 정도를 꼽는데 올해는 이 시집이 맨 앞자리다. 시집은 소설과 다르게 여러 번 읽게 만드는 힘이 있어야 한다. 좋은 약이 입에 쓸지는 몰라도 좋은 시는 일단 입에 붙어 술술 읽혀야 한다. 읽으면서 그 행간에 끼어들 여지가 자꾸 생겨야 반복해서 읽고 싶어진다. 한 권의 시집을 한..

네줄 冊 2021.11.01

땅거미 질 무렵 - 김유석

땅거미 질 무렵 - 김유석 흔들의자에 앉아 그녀는 노을을 짜고 있다. 붉은 벌레들이 그녀의 눈 속에서 기어 나와 하늘을 갉아 먹는다. 풍금소리 같은 게 희미하게 들려오는 철늦은 들판 위로 검은 개가 느리게 걸어오고 있다. 그녀의 눈에 실을 꿰어 저무는 풍경을 몇 땀 뜬다. 멀리 있는 것들이 아주 가깝게 보이고 문득, 낯설다. 늙은 낙타를 타고 가고 싶은 저녁 혼자서는 건널 수 없을 것 같은 저 먼 사막, 목관처럼 누운 마을의 그림자가 길게 끌리면 손가락 끝에서부터 그녀의 몸은 풀어지고 검은 개가 빈 집을 짖어 무늬들을 꺼낸다. 무늬 속에서 짜다만 새가 서쪽으로 날아간다. 서쪽으로 가는 모든 것들, 서쪽엔 집이 없다. 날아가는 새의 날개가 지평선에 걸린다. 흔들의자가 멈춘다. 고요하다 *시집, 상처에 대하..

한줄 詩 2021.10.31

곳,곳 가을 - 이은심

곳,곳 가을 - 이은심 감나무는 감을 낳고 어미나무가 되었다 낙엽이 나무를 비울 때 시월은 더 시월인 것 가을 외에는 아무도 살지 않도록 입구를 단단히 여며두고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길고 얇은 스웨터를 꺼내 입는 일 어제 운 너는 오늘 또 울게 된다고 나무가 하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나무여 나는 당신의 사람이 되지 못해 귀 막고 흘러가는 바람 혹은 각자의 얼굴을 먼 곳처럼 들고 있는 뼈아픈 부의(賦儀) 가을 상가(喪家) 문턱 너머 어린 상주는 삶에서 죽음을 뺀 어깨 넓이를 받쳐 들고 피곤하구나 근처엔 큰 산이 있어서 그림자가 산 것들의 낮은 목소리에 우렁우렁 겹쳐진다 일찍이 하산한 땅에는 한 사람분의 공터가 새처럼 부족한 속내를 푸닥거리하고 곳에서 곳으로 누운 한 사람이 가는 길 새가 깃들어오는 것을 막..

한줄 詩 2021.10.31

깃털 하나를 주웠다 - 김선우

깃털 하나를 주웠다 - 김선우 나만 아는 흰 산이 있다,라고 호숫가 저녁놀 옆에서 중얼거린 순간 깃털 하나가 눈에 띄었다 주워들고 호수에 떠 있는 오리들을 헤아려본다 누구의 어디를 채워주던 깃털일까? 흘려야만 해서 흘린 걸까? 흘려서 혹시 아픈 걸까? 손가락 하나를 접은 자리에 깃털을 대본다 손가락 하나 둘 셋 넷 그리고 깃털손가락 하나 이번엔 손가락을 모두 그대로 두고 깃털을 대본다 손가락 하나 둘 셋 넷 다섯 그리고 깃털 하나 어느 편이 생을 지키는 데 유리할까? 지금은 알 수가 없다 지금은 언제나 알 수가 없다 어쩌면 그래서 생은 나아간다 나만 아는 흰 산이 있다고 중얼거리면서 나만 알고 있다고 믿는 흰 산 쪽으로 *시집/ 내 따스한 유령들/ 창비 작은 신이 되는 날 - 김선우 ​ 우주먼지로 만들어..

한줄 詩 2021.10.31

불가능한 휴식 - 임곤택

불가능한 휴식 - 임곤택 저녁은 아름답지만 너무 짧다 그 다음은 끝나지 않을 것 같고 번식하는 숫자들의 밤 옆방 여자가 벽을 두드린다 그녀의 남자는 등이 긁힌다 늘어진 스웨터 겨울밤이 끌고 다니는 곤궁 왕성한 별빛과 달빛 은밀하고 무례한 안부다 내가 써 놓은 편지를 누가 큰 소리로 읽는다 풍향이 바뀌고 창문의 좌우가 바뀌고 밤낮이 바뀌고 어떤 타락이든 칭찬받을 밤이다 쉽게 길드는 귀를 벽에서 떼어 낸다 불을 켠다 한꺼번에 빠져나가는 기억과 토막들 생쥐처럼 재빠른 일들 사방의 신맛은 사과의 즙이 아니다 그들은 계속 벽을 두드린다 *시집/ 죄 없이 다음 없이/ 걷는사람 먼지와 이파리 - 임곤택 징그러운 잔가지들 그런 것이 있지 너를 기다리는 배고픈 벌레들 그런 것이 있지 찌거기를 다투는 비둘기 먼지를 숨 쉬..

한줄 詩 2021.10.30

이발사의 세번째 가위 - 박지웅

이발사의 세번째 가위 - 박지웅 평생 남의 뒤에서 살았다 이발사는 뒤에서 웃는 직업이다 이발소로 흘러든 것이 구름이라도 깍듯이 대접한다 등 굽은 이발사는 낙타 뼈로 깎은 빗과 세번째 가위를 들고 벽에 길게 덮인 거울로 들어간다 대개 구름은 희미한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다 머리칼을 칠 때마다 약간의 물소리가 빠져나간다 손님과의 대화는 다 뜬구름 잡는 소리, 가위는 은빛 날개를 한 비행기처럼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가 나타난다 그때마다 구름은 머리채 부드럽게 흔들며 눈을 가늘게 뜬다 가죽 의자에 얌전하게 앉아 있는 듯하지만 이발 보자기 걷으면 구름은 어느새 걷히고 없다 뭉클하게 잘려나간 것을 쓸어모으면 바닥에 낙타처럼 웅크린 것들은 파랗게 눈뜬다 일찍이 이발사는 부모가 솜구름을 타 이불 속에 숨기는 것을 알았다 ..

한줄 詩 2021.1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