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나무라기엔 늦은 - 김진규

마루안 2021. 10. 27. 21:51

 

 

나무라기엔 늦은 - 김진규

 

 

그늘이 흩어지는 소리를 듣는다 나무 밑에 앉아 나뭇잎들을 바라본다

이 계절을 떠나는 것들은 모두 소리가 있어

한번이라도 귓가에 머문 것들은

쓸어담을 수도 없이 어딘가에 쌓여간다

 

햇빛은 수많은 시간을 지나고 지나서 내 발 언저리에 구르는 얼룩이 된다

이끼가 돋은 나무를 타고 오르는 개미떼

저것들은 언젠가 자신에게도 돋아날 죽음의 징후들을 알고 있을까

 

이를테면 맞대고 살아온 시간의 색을

푸른 것도 아닌, 검은 것도 아닌

그저 살색이라고 말하는 내가 개미떼를 바라본다

문득 아비의 피부가 떠오르지 않는다

 

나와 아비의 사이를 통과하는 바람

나는 단지 예감할 뿐이다

그가 누리던 수많은 시간과 이야기들

그 모든 걸 나르던 바람을 나는 만난 적 있던가

이따금 이명처럼 찾아오는 밤을 견디다가

 

나무가 나를 내려다보며 생각한다 너는 모른다 아직도 모른다 며칠간 몸살을 앓아야만 너는 아비의 푸석한 겉옷을 떠올릴 것이다

나뭇잎 한 개가 나에게 떨어진다 나는 말라버린 문맥을 정신없이 읽는다 이것은 다른 곳에서 온 마지막 행이다

 

본 적 없던 열매들이 여기저기 목을 메고 있다

저마다의 색으로 서서히 익어가고 있다

 

 

*시집/ 이곳의 날씨는 우리의 기분/ 여우난골

 

 

 

 

 

 

쥐구멍 - 김진규

 

 

쥐처럼 도망가는 쥐의 길들이 궁금해졌다

길들일 수 없을 것 같은 불빛들의 행로

집으로 돌아가려면 어쩔 수 없이 숨어야 하는

(여기서 나는 의문을 품었다)

쥐의 슬픈 몸짓이, 그 자동반사적인 습관이 궁금해졌다

 

먼 시간을 돌아 앞니를 세우는 습성을 기억해낸다

앞니를 세워야 킁킁거릴 수 있고, 도망갈 수 있고

조심스럽게 손을 모았을 때,

이루 말할 수 없는 안정이 찾아왔다

내 손을 맞잡는 일이 가장 셀레는 일이 되나니

 

그런 생각을 갖게 한 신앙 같은 것이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곁에 없는 것만을 사랑하고

눈 속에 자기도 모르는 감옥 하나쯤 가진 것만이

스쳐온 길들을 기억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믿었다

사선으로 쏟아지는 계단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당신은 나의 방을 향해 걸을 때

언제나 내 심장을 밟으며 걸었지

나는 반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방문 밖으로 고개도 내밀 수 없는 방관

조각나는 꽃병들 틈에 누군가의 손을,

아아 틈으로도 들어올 수 없는 그 빛을 말하는 것이다

 

불러도 나오지 않을 거야?

 

어떤 식으로든 쥐가 태어난다는 것,

쥐의 앞니는 스스로를 갉을 수 없다는 것

이건 꼭 교리의 맨 앞에 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 김진규 시인은 경기도 안산 출생으로 2014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2017년 경기문화재단 예술창작지원 시부문에 선정되었다. <이곳의 날씨는 우리의 기분>이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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