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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꽃 - 임경남

종이꽃 - 임경남 사막을 건너왔어요 모래바람을 타고 내가 하는 말은 하도 서걱거려 다른 사람들은 알아들을 수가 없었어요 일 년에 한두 번 온다는 비를 기다린 적도 있지만 뿌리를 내리는 대신 떠도는 법을 익혔지요 한 번도 젖을 물린 적 없는 내 몸은 종이꽃 헛물관을 타고나는 바람에 푸른 잎맥만 무성했어요 건조증이 심한 날은 온몸이 가려워 밤새도록 비듬을 긁어모아 일기를 쓰기도 했는데 문장마다 잔물결이 일어 쉬이 읽어낼 수가 없었어요 여전히 달(月)마다 꽃잎 청구서는 날아들고요 내 몸은 바람을 찢고 온 건기에 시달렸어요 사막에서도 꽃이 피네요 외로움도 간이 배어 세상의 안부 쪽으로 귀를 기울이면 저만치 잘 다듬은 눈물이 반짝반짝 보석처럼 빛나던 걸요 *시집/ 기압골의 서쪽은 맑거나 맛있거나/ 북인 능소화 흘..

한줄 詩 2021.10.26

숨은 운명 - 천수호

숨은 운명 - 천수호 아무리 더 가지려 해도 창(窓)은 단호하게 "거기까지!" 네 음절의 칼날로 내리친다 칼끝과 칼끝이 부딪치며 멈춘 냉철한 선(線)의 세계 더 가질 수 있는 날을 생각하면 웃음이 나니까 틀이 깨질 때까지 수건을 절반으로 접는 연습을 했다 저곳은 유연해 허리를 쉽게 휘는 것들은 창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아 '묘안'이라는 이름을 붙여준 눈동자가 봉분 같은 고양이가 물어뜯을 것이 있는 쪽으로 허리를 휘는 장면처럼 매미 소리가 내 몸을 아무 곳이나 뚫으면서 애벌레 걸음으로 왔다가 간다 내게 저렇게 왔다 가는 것들 창을 건드리지 않으면 도저히 담장을 넘을 수 없는 것들 창을 내다보다가 순간이라는 말이 화면을 닫았다가 열면서 검은 새떼를 쫓는 장면을 목격한다 오늘의 창은 여기까지! 선을 자르는 칼날..

한줄 詩 2021.10.23

내 안에 머물던 새 - 박남원

내 안에 머물던 새 - 박남원 내 안에 한동안 머물던 새는 반은 떠나고 반이 남았다. 그래서 떠나버린 것도, 다 남아있지도 않은 네가 나를 아프게 한다 꼭 반은 떠나고 반은 남았으므로 나는 온전히 너를 떠나보낸 것도 내 안에 온전히 잡아둔 것도 아니다. 어느 날 다 날아가라고 , 다 날아가버리라고 대문을 열어두고 몇 날 며칠을 끙끙 앓았으나 그러면 다 떠나버릴 줄 알았던 너는 이번에도 단지 반만 떠나고 여전히 반은 계속 남아있다. 다 떠나버리거나 내 안에 온전히 남아 있지 않은 너는 하루 종일 바람 부는 바다 기슭 같은 데를 이리저리 날아다니다가 해가 저물면 기어이 내 가슴의 문을 열고 날아 들어와 내 심장의 벽에 모이를 쪼며 밤새 쿡쿡쿡 바늘을 찔러댄다. 한번 와서는 어디로 갈 생각도 하지 않고 밤이 ..

한줄 詩 2021.10.23

북한산, 의상봉-용출봉-나한봉-승가봉-족두리봉

연신내에서 탄 버스에서부터 산꾼으로 완전 만원이다. 일찍 나선다고 했는데도 이렇다. 다음엔 좀 더 일찍 출발하던지 아니면 아예 점심 시간 가까운 11시쯤에 출발하는 게 붐비는 걸 피하는 방법이 되겠다. 북한산성 탐방센터를 출발해 조금 걸으면 의상봉 가는 길이 나온다. 쾌청한 시월 하순의 북한산은 산행하기 딱 좋은 날이다. 이렇게 시원한 조망을 만나기도 오랜 만이다. 의상봉 가는 길에 만나는 독특한 바위 옆에서 잠시 땀을 식히며 한숨을 돌린다. 갈수록 북한산에서 건강한 소나무 만나기가 쉽지 않은데 이런 소나무를 보면 고맙고 반갑다. 의상봉에서 바라 본 조망이 가슴을 시원하게 한다. 단풍은 아직이나 빠르게 물들 것이다. 오늘 걸어야 할 용출봉과 증취봉 능선이다. 좌우 조망이 좋아 쉬엄쉬엄 걷기에 좋은 등산길..

일곱 步 2021.10.23

유령은하 - 윤의섭

유령은하 - 윤의섭 길 끝에는 길이 있었다 낙엽이 떨어지는 속도로 가을은 늙어갔고 야간 등산로를 알려주는 표지판을 지나 몇몇은 다음 계절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여기까지 와보지 않았다 언제부터 파국 너머로 내닫기를 멈춰왔던 것일까 말라붙은 저녁의 태양처럼 나는 건조한데 방금 스쳐간 누군가에게선 베이비 로션 냄새가 났고 내게선 수십 년이 거슬러 흐른다 너는 다른 로션을 바른 적 없었다 감각이 고통스러우면 기억이 아픈 것이다 내가 덜 미치고 내가 덜 다가섰을 때 숨은 거라고 믿었다면 들키지 않았을 뿐이며 내가 나로부터 떨어져 나와 길의 관성을 어긴 채 늘 길의 궤도 안으로 되돌아간 것이라면 원일점에 다다랐어도 견뎌야 하는 것이라면 나는 감옥이니 한 뼘 창문으로는 곧 눈의 은하가 흩뿌릴 것이다 가로등이 켜지고 ..

한줄 詩 2021.10.22

가을비의 그대들 - 우대식

가을비의 그대들 - 우대식 가을비에 하루를 탕진하고 막걸리 잔을 든다 신성한 밤이다 아무도 오지 않는 밤이다 부풀어 오른 허무의 알갱이들이 빗속을 둥둥 떠다닌다 젖은 발을 부비며 떠돌던 골목 술집들을 떠올린다 가을비 내리던 밤은 다 어디로 갔나 백열등 아래 김이 오르던 주막에서 키득대던 가을날의 그대들은 어디로 갔나 가을비여 젖은 책장을 넘긴다 젖은 그대를 넘긴다 *시집/ 베두인의 물방울/ 여우난골 잔상(殘像) - 우대식 비가 온다. 호박잎에 무수히 떨어지는 빗줄기, 유키 구라모토의 음악을 듣는다. 내 안에서 이런 소리가 들린다. 이만하면 되지 않았는가? 한 세월의 풍경을 이렇게 그려도 되지 않겠는가? 먼 들판을 바라본다. 어떤 망설임 앞에 선 낙수(落水)처럼, 망설임이라는 말 앞에 잠시 정차한다. 제천..

한줄 詩 2021.10.22

겁내지 말고 - 이시백

겁내지 말고 - 이시백 혹시 말이지 이런 생각이 든다면 말이지. 사는 동안 나는 깨끗하게 살았다고 속으로만 생각하자 그 말이지. 누군들 정갈하게 살고 싶지 않았겄어 살다보이 억척도 부리고 용심도 쓰면서 사는 거지. 삶의 기준이 있는 듯이 떠들면 나의 가치가 올라가는감? 원래 인생은 낙엽처럼 시들며 단풍이 드는 거잖소. 이제 나이가 있으이 아량을 먼저 가져야 혀. 다 챙겨야 만족한다면 옆사람이 얼마나 경계하겄어. 허니 겁내지 말고 먼저 양보혀. 다 똑같이 단풍들고 시드는 과정인디 뭘 그리 섧다 하리까. 칭칭 동며맨 내 안의 욕구 이제 놓아주고 평지로 돌아가야지. 높은 산이 아니라 낮은 구릉에 이르러 얕은 무덤으로 나는 갈 거야. 속으로만 쬐금 깨끗하게 살았다 말할 거야. *시집/ 널 위한 문장/ 작가교실 ..

한줄 詩 2021.10.22

히트의 탄생 - 유승재

재밌게 읽었다. 오십대에 접어들면서 노후 대책보다는 추억을 되새기는 일이 잦아졌다. 이런 책이 눈에 쏙 들어오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책 외에는 신상품에 대한 호기심이 별로 없는 편이다. 가령 스마트폰을 주변 사람들 다 갖고 있어도 홀로 폴터폰을 썼다. 모임에서 연락 수단을 전화가 아닌 카톡으로 통일하자 어쩔 수 없이 스마트폰을 썼다. 지금은 스마트폰이 없으면 일상을 제대로 유지할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그래도 많은 부분에서 여전히 아날로그로 산다. 나는 요즘은 거의 쓰지 않는다는 공동인증서를 아직 이용한다. 공동인증서가 특별히 불편한 것은 없고 오히려 익숙해서 더 편하다. 보안? 과연 나한테 보안을 요구할 만한 일이 있을까. 비밀 번호도 최대한 기억하기 좋은 것으로 한다. 공짜나 요행을 바라지 ..

네줄 冊 2021.10.22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 김연진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 김연진 너무 오래 살았다 시간의 전리품처럼 낡고 오래된 동네 살아서 온 것들이 병들고 깨지고 묻히는 동안 나는 그곳에 있었다 그곳에서 밥을 먹고 숨을 쉬고 눈을 깜박거렸다 그늘이 사라지지 않는 담벼락 밑에서 채송화와 개미를 낮은 곳에서 이는 바람을 보았다 길을 지운 골목들은 행방이 묘연해지거나 도둑고양이처럼 꿈을 훔쳐 달아났다 죽음의 냄새와 결핍의 몸들이 엉켜 있는 동네 밤낮이 바뀐 아이들은 유령처럼 담을 넘어 신발을 끌고 가곤 했다 먼지 같은 기억들이 먼지를 만들어 쌓여 있는 곳 대추나무가 꽃을 열고 앵두꽃이 거미줄에 걸리는 동안 이곳의 승자는 시간뿐 한번 흘러간 나는 결코 돌아오지 않았다 *시집/ 슬픔은 네 발로 걷는다/ 한티재 공갈빵 - 김연진 발톱이 그만 자랐으면 좋겠어 ..

한줄 詩 2021.10.21

가을밤 - 육근상

가을밤 - 육근상 풀벌레 울음 가슴을 찢는 밤이다 먹감나무 이파리가 먼 길 다녀온 듯 툇마루 내려앉으며 적막을 깬다 나는 바람벽 비스듬히 기대어 안방 바라보는데 한숨인 듯 앓는 소리인 듯 가쁘게 몰아쉬던 숨소리도 없이 텅 빈 방이 컴컴하게 뚫어놓은 굴속 같다 나지막이 엄마 하고 부르니 아랫목 깔아놓은 이불이 자다 꿈을 꾼 듯 누구여 애비여 언제 들어온겨 아이고 깜짝 놀랐네 또 꿈속으로 들어간 듯 찌푸린 미간으로 고욤나무 가지 걸린 달이 노랗게 익어간다 나는 컴컴한 빈방 향하여 엄마 하고 부르면 엄마는 바람벽에서 내려다보기만 할 뿐 아무 말 하지 않는다 내가 다시 엄마 하고 부르니 텃밭 풀벌레가 나를 따라 하는 듯 엄마 하고 우는 밤이다 *시집/ 여우/ 솔출판사 가을 - 육근상 바라보기만 해도 쨍그랑 깨질..

한줄 詩 2021.1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