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이발사의 세번째 가위 - 박지웅

마루안 2021. 10. 30. 19:27

 

 

이발사의 세번째 가위 - 박지웅


평생 남의 뒤에서 살았다
이발사는 뒤에서 웃는 직업이다

이발소로 흘러든 것이 구름이라도 깍듯이 대접한다 등 굽은 이발사는 낙타 뼈로 깎은 빗과 세번째 가위를 들고 벽에 길게 덮인 거울로 들어간다

대개 구름은 희미한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다
머리칼을 칠 때마다 약간의 물소리가 빠져나간다

손님과의 대화는 다 뜬구름 잡는 소리, 가위는 은빛 날개를 한 비행기처럼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가 나타난다 그때마다 구름은 머리채 부드럽게 흔들며 눈을 가늘게 뜬다

가죽 의자에 얌전하게 앉아 있는 듯하지만
이발 보자기 걷으면 구름은 어느새 걷히고 없다

뭉클하게 잘려나간 것을 쓸어모으면
바닥에 낙타처럼 웅크린 것들은 파랗게 눈뜬다

일찍이 이발사는 부모가 솜구름을 타 이불 속에 숨기는 것을 알았다 어린 그는 자주 울면서 농에 들어갔다 거기에 아이들이 꽃다발처럼 이마를 붙인 채 울고 있었다 뭉게뭉게 어둠과 뭉쳐진 무늬들이 목관에서 흘러나갔다

낙타는 등에 구름을 얹고 산다
베두인들은 비가 꼭 필요해지면 낙타의 혹을 찌른다

구멍에서 흘러나온 검은 구름을 마시는 꿈에서 이발사는 세번째 전생을 보았다 그 생애에서 그는 나무피리로 흰 낙타를 불러 구름을 꺼냈다 죽은 것의 눈꺼풀 위에 돌을 얹고 한 줄로 된 현악기를 켜며 저 낭떠러지에 떨어진 쓸쓸한 음악을 한 번은 찾으러 가야지 마음먹었다

이발사가 묻힌 창에 몇 개 구름이 돌처럼 얹혀 있다

 

*시집/ 나비가면/ 문학동네

 

 

 

 

 

 

별에서 자꾸 석류향이 났다 - 박지웅

 

 

노을과 나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거늘

그것이 이리 좋아서 눈이 물렁해질 때까지 겨워하였다

 

남해 하늘 속으로 아물듯 박새가 사그라진 저물녘

 

한 사오 리 걸었을까

붉고 쓸쓸한 잔등 쓸며 가까이 걸었을까

 

쓰다듬은 손바닥에 몇 구절이 피어서 지고

난 지 열이레 어린 석류가 놓여 있었다

 

키스는 촛불보다 오래 켜져 있고

살 한번 섞지 않은 별에서 자꾸 석류향이 났다

 

 

 

 

 

*시인의 말

저세상과 섞여 있는 이 세상의 해안선으로
밀려오는 가면들
그중에 하나를 쓰고 살아간다

이 삶이 보이지 않는 것에 시달리기는 해도
행복하게 견디고 있다

그쪽만이 아니겠으나
남쪽에서 혹은 나비 쪽에서
빌려온 구절들을
제 살던 하늘땅으로 돌여줄 때가 되었다

내려놓으면 날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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