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4746

묘비명에 대한 답신 - 우대식

묘비명에 대한 답신 - 우대식 칸트의 길을 걷는다 오후 3시 30분 정확한 시간에 느릅나무 아래를 지나 문이 닫힌 카페 앞 노천에서 담배를 피워 문다 아직 지팡이를 쥘 나이는 아니다 바쁜 사람들이 지나가지만 나는 그들을 보고 있지 않다 생각과 싸우는 사람 지금까지 모든 생각을 불태울 수 없을까 신의 증명이라는 정거장 앞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다 아닌 척했지만 늘 사소한 불안함에 모든 것을 망치곤 하였다 칸트의 묘비명은 맑고도 슬프다 그가 경이롭게 생각했던 것은 별과 도덕 법칙이었겠지만 나를 채찍질한 것은 그 앞의 전제일 뿐이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어떤 고독 같은 것으로 인해 설명할 수 없는 괴로움과 달콤함에 취해 살아왔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무언가 어긋났다는 내용의 편지를 쓸 수밖에 없다 칸트에게 저녁밥은..

한줄 詩 2021.11.17

부동산, 누구에게나 공평한 불행 - 마강래

올 한해는 부동산 문제로 온 나라가 들썩였다. 언제나 사람 사는 시대에서 의식주가 중요하다. 희한하게 진보 정권만 들어서면 부동산이 폭등한다. 문재인 정부에서도 집값을 잡는 것을 최대 과제로 삼았지만 시장은 비웃기라도 하듯 백약이 무효였다. 내년 대선에서 가장 큰 이슈도 부동산 문제다. 부동산이라 하지만 그 말은 곧 집값이다. 집값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보여주는 사람이 주목을 받을 것이다. 한국은 전 국민이 축구 감독이고 정치 평론가다. 축구 국가 대항전을 텔레비전 중계로 보며 모두 국대 감독이 된다. 저 새끼는 왜 뽑았냐는 둥, 이쪽으로 패스해야지 생각이 없다는 둥, 현재 감독이 아예 전술도 없고 주먹구구식이라는 둥, 집값 문제도 전문가가 없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많아서 문제다. 마강래 선생은 오랜 기간..

네줄 冊 2021.11.15

더 이상 어리지 않은 어린왕자의 - 강건늘

더 이상 어리지 않은 어린왕자의 - 강건늘 사실들이 사라져버린 먼 우주에서 마주하는 공허 깊은 회한에 잠겨 무수한 별들을 바라본다 내가 사귀었던 모든 것들을 잃어버렸다 오직 기억만이 있을 뿐 꽃은 시들고 아예 사라져버리고 바람도 멈추어 선 지금 처음처럼 다시 혼자 서 있다 깊은 잠을 자야 한다 스스로 깰 수도 누군가 깨울 수도 없는 아득한 잠 이제 행성도 나와 함께 사라질 시간 그런데 쉬 잠들지 못할 것이다 내가 사귄 것들 잎사귀들처럼 다시 살아나고 이야기는 멈추지 않을 테니까 죽지 않는 나무처럼 우리의 이야기는 *시집/ 잠만 자는 방 있습니다/ 달아실 희망 사절 - 강건늘 지하도 한 켠 박스 안 옅은 어둠이 어둠을 덮고 누워 있었다 어둠이 쉬는 곳 절망의 쉼터 희망을 강요하지 못하도록 희망이 쫓아오지 ..

한줄 詩 2021.11.15

가을, 하얗게 저미는 바깥 - 송병호

가을, 하얗게 저미는 바깥 - 송병호 지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알코올의 표정도 진다 좁은 보폭으로 비켜 가는 숲 먼저 난 것이라고 먼저 지는 것도 아닌데 계절을 업고 가는 바람처럼 누구는 돌아가고 누구는 다시 오고 좋은 말을 해도 좋게 들리지 않아 눈만 멀뚱, 먼 산 바라보는 사슴처럼 책갈피에 화석이 된 색 고운 엽서 한 장 詩의 주어가 될 수 없는 것처럼 살충등 손님 뜸하고 발자국 거꾸로 걷는 서걱거리는 저녁 이별이다 삭연한 그림자가 돌아오는 *시집/ 괄호는 다음을 예약한다/ 상상인 느린 우체통 - 송병호 다리를 풀고 무형의 영역으로 가는 사람들 시간은 확고한 빗장으로 고정되어 있는데 흔한 것들은 눈에 뜸해지고 칸칸마다 채워가야 할 계절의 끝자락 모든 것이 병약했던 때의 흔적이다 어느 한 때로 거슬..

한줄 詩 2021.11.15

의외의 대답 - 천양희

의외의 대답 - 천양희 내가 세상에 와 잘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말보다 침묵으로 말하겠다 강변에 나가 앉아 물새야 왜 우느냐 물어보았던 것 나는 왜 생겨났나 생각해보았던 것 내가 세상에 와 잘한 것이 무엇이냐고 다시 묻는다면 흘러가는 말로 다시 말하겠다 강가에 서서 그냥 미소 짓고 답하지 않는 노을을 오래 바라보았던 것 나는 왜 사나 알아보았던 것 내가 세상에 와 제일 잘한 것이 무엇이냐고 거듭 묻는다면 사람의 말로 거듭 말하겠다 무릎 꿇고 앉아 남의 고통 앞에 '우리'라는 말은 쓰지 않았던 것 나는 왜 사람인가 물어보았던 것 내가 세상에 와 끝까지 잘한 것이 무엇이냐고 끝까지 묻는다면 마지막 남은 나의 말로 끝까지 말하겠다 단 한 사람이라도 마음 살려주고 떠나는 것 다시는 몸 받지 않겠다며 나를 ..

한줄 詩 2021.11.15

북한산, 육모정-영봉-백운대-숨은벽-밤골

올 가을 날씨는 유난히 종잡을 수 없는 날이 많았다. 시월 초순 늦더위로 30도를 기록하더니 시월 중순 역대 가장 이른 한파가 몰아쳤다. 11월 들어서는 입동날 21도를 기록하면서 30년 만에 가장 따뜻한 입동을 기록 하더니 불과 며칠 후 다시 기온이 20도 가량 곤두박질치면서 북한산에 첫눈이 내렸다. 오늘 날씨도 맑기는 하나 바람도 심하고 오전 추위가 대단했다. 우이역에서 내려 곧장 육모정 입구로 향한다.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늘 들렀다 가는 용덕사에서 합장 세 번으로 신고식을 한다. 외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반야경 소리에 잠시 귀를 기울인다. 뜻은 이해하지 못해도 낭낭한 독경 소리가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추운 날인데도 얼지도 마르지도 않은 샘물을 지나 잠시 오르면 육모정 고개에 도착한다. 육모정 ..

일곱 步 2021.11.13

친애하는 나의 민원인 - 정명원

읽고 나서 마음이 아주 따뜻해지는 책이다. 스스로 외곽주의자라 말하는 현직 검사가 쓴 책이다. 요즘 유독 검사라는 직종에 대해 비호감을 갖고 있던 차에 이 책이 검사에 대한 비호감 정서를 조금 정화시켰다 할까. 애초에 검사에 대해 좋은 인상이 아닌데 요즘 고발사주로 수사 대상이 된 김웅 의원을 보자. 검사 출신의 보수당 국회의원으로 기대를 모았으나 이 사건으로 극강 비호감이 되었다. 예전에 그의 책 을 읽을 때만 해도 비교적 호감이었다. 김웅이 검사 옷을 벗고 보수당 국회의원이 되었을 때만 해도 그러려니 했다. 내가 지지하는 정당은 아니지만 적어도 기존의 보수당 사람과는 다를 줄 알았다. 얼마 전 식당에서 친구와 밥을 먹는데 TV 뉴스에 김웅 의원이 나와 고발사주 사건 해명을 했다. 밥 먹던 친구 왈 "..

네줄 冊 2021.11.12

혹시나 하고 산다 - 김주태

혹시나 하고 산다 - 김주태 혹시나 하고 사는 인간들이 주위에 많다 올해는 고추 금이 좀 괜찮을까 있는 밭 없는 밭 고추만 심고 작년에 생강 좋았다고 올해도 혹시나 싶어 논을 밭으로 바꿔 생강만 심고 혹시나 해서 논밭 팔아 주식 하다 다 털어 소식 끊기고 혹시나 싶어 송아지 왕창 들였다가 사룟값만 올라 날품 팔러 다니고 쉰 넘어 장가가서 혹시나 늘그막에 대 이을 아들 하나 보나 했는데 바다 건너온 색시는 이틀 만에 사라지고 아들 대학 졸업하고 살림이 좀 펴지려나 싶었는데 방에서 뒹굴고 있고 혹시나 농협 빛 더 낼 수 있을까 싶어 아침 먹고 부리나케 일어선다 혹시나, 혹시나 하는 사이에 세월만 간다 *시집/ 사라지는 시간들/ 삶창 노갑 씨 가을이 간다 - 김주태 식전 댓바람 치매 걸린 노인 가시나무 한 아..

한줄 詩 2021.11.12

단풍나무 숲을 걸으며 - 박남원

단풍나무 숲을 걸으며 - 박남원 누가 뭐래도 묵묵히 앞만 보고 걸었어야 했는데 돌이켜보면 내 인생은 부질없이 허비한 곳이 너무 많았다. 잔가지는 흔들려도 뿌리까지는 내주지 않는, 때가 되면 초록에 감춰둔 빛깔들을 열어 강물처럼 유유히 흘려보내는, 저 현현한 붉은 잎들의 복자기나무들처럼 묵묵히 시간을 견디며 수액을 나르고 나이테를 쌓았더라면 어느덧 나 또한 저 황홀한 계절의 일부가 되지 않았겠는가. 인생의 외길에 남아 나는 긴 한숨을 내쉬네. 살면서 세상의 작은 바람에도 쉽게 흔들리고 말았을 때 나무들은 결코 제 속까지 흔들리고 있지는 않았다는 것을. 뿌리는 땅속 깊이 묻어두고 비바람 속에서도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는 것을 세월이 많이 지나고 난 후에야 나는 비로소 깨닫네. 내 안의 사소한 돌부리에도 쉬..

한줄 詩 2021.11.12

유효기간 - 석정미

유효기간 - 석정미 감자에 싹이 났다 딸들은 버리라고 호들갑이지만 버리지 못하는 나 유효기간까지 버티다가 못 견디면 상처에서 싹이 나고 독을 품고 커간다 유효기간 지난 우유도 마시고 두부도 먹는다 독을 먹고 산다 나는 점점 독해진다 언제까지일까? *시집/ 대광여인숙/ 어린왕자 자두 - 석정미 까만 얼굴에 자두가 떨어진다 장마철 비 내리면 자두로 덮인 발 썩어 문드러져도 지게로 져내던 핏빛 사랑 비탈밭엔 언제나 자두나무가 산다 억세게 퍼부어도 무너지지 않는 밭둑엔 분홍 패랭이 피고 뻐꾸기 우는 서글픈 장마 속 자두 해마다 자두는 죽어라 열린다 # 석정미 시인은 1966년 경북 영주 출생으로 2012년 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 이 있다.

한줄 詩 2021.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