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꽃다발 - 서수자

마루안 2021. 11. 2. 22:23

 

 

꽃다발 - 서수자

 

 

꽃다발을 들고

마로니에 공원을 걸어간다

백발이 걸어간다

쥐도 새도 모르게 남 같은 내가 걸어간다

 

남아 있는 회한도 없이

떠오르는 이름도 없이

텅 비어 있는 내 안에

한 다발의 꽃향기를 툭 던진다

비어 있어라 비어서 가득 차라

그 향그런 충만

 

날이 갈수록 더 사무칠 오늘의 나여,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가

뼈 마디마디 사리 같은 것만 가득하구나

 

강물에게 미안해, 미안해

동행해준 모든 길에게 고마워, 고마워

박수쳐주는 나에게

내가 꽃다발을 선사한다

우러러보는 마로니에나무와 은행나무들이

낙엽을 흩뿌리며 환호한다

 

찬바람에게 체온 한 벌을 벗어준다

또 한 벌을 벗어준다

예술인의 집은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시집/ 아주 낮은 소리/ 천년의시작

 

 

 

 

 

 

알리바이 - 서수자

 

 

구태여 말하라면 나는 내가 그리울 뿐

아무것도 그리운 게 없어

 

접근 금지 금줄 하나 내걸었다가

도리어 내 허리가 걸리고

보이지 않은 벽 하나 세웠다가 내가 갇혔다

 

방 안에 무릎 끌어안고 앉아

거부하기 밀어내기로 굳어버렸다

 

내가 민 어깨가 다른 사람의 어깨를 밀고

밀린 어깨와 어깨들이

전동차를 기다리던 장님 하나 치어버렸다

 

시민들의 무심이 범인이라고

수사는 산뜻하게 종결되고

스크린도어가 설치되었다

 

무서운 것은

누군이 이 은밀한 비선 조직 계보도를

그리고 있었다는 것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