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대답이고 부탁인 말 - 이현승 시집

마루안 2021. 11. 1. 22:12

 

 

 

진공청소기에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흡인력 있게 읽히는 시집이다. 지루증 환자처럼 웬만한 시집에는 감흥이 없거나 좀처럼 감탄하지 못하는 편인데 이 시집은 드물 게 예외다. 아직 두 달쯤 남았지만 아마도 내가 정한 올해의 시집이 될 듯싶다.

 

해마다 연말이면 나름의 규칙이 있다. 한 해에 본 영화와 시집을 나열해 보면서 나 혼자만의 시상(施賞)을 하는 것이다. 코로나 때문에 영화 보기는 많이 줄었으나 읽은 시집 숫자는 늘었다. 보통 5권 정도를 꼽는데 올해는 이 시집이 맨 앞자리다.

 

시집은 소설과 다르게 여러 번 읽게 만드는 힘이 있어야 한다. 좋은 약이 입에 쓸지는 몰라도 좋은 시는 일단 입에 붙어 술술 읽혀야 한다. 읽으면서 그 행간에 끼어들 여지가 자꾸 생겨야 반복해서 읽고 싶어진다.

 

한 권의 시집을 한정식 밥상이라고 해보자. 쫙 깔린 반찬이 모두 내 입맛에 맞고 맛있기만 하던가. 먹어 보고 자꾸 손이 가는 반찬이 있는 반면 아예 젓가락 한 번 대지 않은 반찬도 있다. 한 번 맛보고 다시는 손이 안 가는 반찬은 장식품에 불과하다.

 

고기 좋아하는 사람 있는 반면 나물 좋아하는 사람 있듯이 음식에도 호불호가 있기에 내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음식이 아니라 할 수는 없다. 내가 특이 체질이 아니고 꼰대 입맛도 아니어서 웬만해선 편식을 하지 않는다.

 

손님이 안 먹은 반찬은 버리거나 주인 차지다. 내가 유독 시에만 편식을 하는 체질일까. 시중엔 일기장에나 있을 법한 시집이 수두룩하다. 안 읽으면 그만이건만 욕 먹을 각오로 한 마디 보태면 일종의 활자 공해다.

 

일기장에 어떤 내용이 있던지, 이불 속에서 자위 행위를 하던지 관여할 일 아니다. 그것이 밖으로 나올 때 음란 행위가 되고 활자 공해가 되는 것이다.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 선생이 그랬다던가. 책을 만들려면 나무를 베야 하는데 그래서 책 낼 때 신중해야 한다고,, 다행히 시집은 두껍지 않아서 나무가 덜 들어간다. 

 

 

*인간에 대한 최대의 딜레마는

재난으로 죽은 사람보다

사람이 죽인 사람이 더 많다는 것, 슬프지만

우리의 행운은 언제나 누군가의 불행에 빚지고 있다.

 

*시/ 물구경/ 일부

 

 

*목숨을 건 전투에서 생환한 사람들이 그렇듯
두려움과 고통과 절망적인 외로움이
살아남는 것의 대가로 주어진다.
비명이 빠져나간 자리를 들숨이 황급히 메우듯
얼마간 두려울 수 있음이 더 살 수 있음이기도 하다.

 

*시/ 회복이라는 말/ 일부

 

 

이현승의 시는 비교적 긴 편이다. 그런데도 밀도가 높고 몰입감이 있어 전혀 지루하지가 않다. 노래보다는 낭송하기에 더 적합하고 서정성보다 서사성에 더 가깝게 느껴지기 때문일까. 기발한 비유와 절묘한 비틀기가 같은 시를 여러 번 읽게 만든다.

 

내 주변은 독서보다 먹고 노는 것에 비중을 두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얼마전 지인을 기다리며 이 시집을 읽고 있는데 그런다. "요즘도 시집 읽는 사람 있어요? 시집 하나 추천해 주세요." 웬만해선 책을 추천하지도 않지만 이런 질문을 받으면 가능한 책은 읽지 말라고 한다.

 

그럼에도 망설임 없이 이 시집을 추천했다. 며칠 뒤 문자가 왔다. "이 시집 괜찮은데요?" 그리고 참 인상적인 시라며 제목 없이 시 한 구절을 보냈다. 이런 걸 이심전심이라고 하던가. 그와 나는 시로 서로 통했다.

 

 

다정다감 - 이현승

 

조현병이나 류머티즘처럼

일생을 두고 앓는 병에 대해 생각한다.

처음엔 살이 터질 듯 조이는 구속복 같다가

마침내 제 살갗처럼 익숙해진 병.

 

일생 병과 함께 사는 삶이라면

한 절반은 아프고 절반은 또 견딜 만한 생일 텐데

 

아플 때는 잠 속에서도 아프고 꿈속에서도 아파서

어젯밤 꿈에 나한테 왜 그랬냐고 따지는 사람처럼

도대체 왜 이렇게 아픈 거냐고 따져 묻고 싶지만

 

아픔의 한가운데는 까무룩,

태풍의 눈처럼 섬뜩한 고요가 있다.

풍경소리가 빠져죽은 연못의 적요.

금방 숨비소리처럼 다시 헐떡임이 떠오를 것만 같다.

 

내내 아프다가 이따금 통증을 잊는 삶은

견딜 만하다가 잊을 만하면 다시 아픈 삶일 텐데

아픔을 잠시 잊은,

언제고 불쑥 찾아올 아픔을 기다리는

나는 이따금 시가 이런 통증이 아닐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