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빈집에 풀씨 날아와 속절없이 번지고 - 하외숙

마루안 2021. 11. 2. 22:36

 

 

빈집에 풀씨 날아와 속절없이 번지고 - 하외숙

 

 

나이가 들면 눈썹도 떠나보내야 하는지

 

너무 오래 사는 게 아니냐며

한숨짓던 앞마당의 감나무

무성했던 아파리 대신 형체만 남아 무망한 노인 같다

 

굽어보는 풍경이 절경이라지만

슬레이트 지붕엔 풀씨 날아와 속절없이 번지고

깨진 장독엔 그렁그렁 낙숫물 고였는데

 

사립문짝은 어디로 달아나고

기울어진 기둥이 겨우 떠받치고 있는

늙은 집,

 

허물어진 돌담 너머로

저녁 햇살 비낀 먼 산 바라보며

자꾸만 흘러내리는 바지춤 추켜올리는 터주 감나무

 

한 번 떠난 사람은

훨훨 다시 돌아오지 못하네

 

 

*시집/ 그녀의 머릿속은 자주 그믐이었다/ 시와반시

 

 

 

 

 

 

수면과 불면 사이 - 하외숙

 

 

침실은 수면 아래 침몰한 한 척의 배

파도에 떠밀려 실종된 잠은 밤의 부유물

출구를 찾으려 해도 떠오르는 부표가 없다

 

방구석에서 맹목적으로 돌아가는 선풍기

사방의 벽마저 실어증에 걸려 침울한 표정

천정의 꽃무늬 벽지도 냉소적이다

 

햇빛이 실로 눈부실 때는 울고 싶었다

 

간병인조차 없는 밤은 무섭게 되살아나

쏟아내는 스탠드 불빛 환청으로 들리는지 혼잣말,

 

약은 먹었어? 잘 지내지? 오늘 하루 어땠어?

 

죽은 그림자와 함께 밤마다 판독되지 않는 가위 눌림

비밀 삼키듯 또 한 알 털어 넣으면

바다 한가운데 난파선처럼 가라앉는 몸

 

 

 

 

 

# 하외숙 시인은 경남 거창 출생으로 2016년 <대구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그녀의 머릿속은 자주 그믐이었다>가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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