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땅거미 질 무렵 - 김유석

마루안 2021. 10. 31. 19:17

 

 

땅거미 질 무렵 - 김유석

 

 

흔들의자에 앉아 그녀는 노을을 짜고 있다.

붉은 벌레들이 그녀의 눈 속에서 기어 나와 하늘을 갉아 먹는다.

풍금소리 같은 게 희미하게 들려오는 철늦은 들판 위로

검은 개가 느리게 걸어오고 있다.

 

그녀의 눈에 실을 꿰어 저무는 풍경을 몇 땀 뜬다.

멀리 있는 것들이 아주 가깝게 보이고 문득, 낯설다.

늙은 낙타를 타고 가고 싶은 저녁

혼자서는 건널 수 없을 것 같은 저 먼 사막,

목관처럼 누운 마을의 그림자가 길게 끌리면

손가락 끝에서부터 그녀의 몸은 풀어지고

 

검은 개가 빈 집을 짖어 무늬들을 꺼낸다.

무늬 속에서 짜다만 새가 서쪽으로 날아간다.

서쪽으로 가는 모든 것들, 서쪽엔 집이 없다.

날아가는 새의 날개가 지평선에 걸린다.

흔들의자가 멈춘다. 고요하다

 

 

*시집, 상처에 대하여, 한국문연

 

 

 

 

 

 

비밀, 혹은 비상구가 있는 세월의 집에서 - 김유석

 

 

밖에서 자물쇠 채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 집에 들어설 때마다 그 소리를 들었다
캄캄한 벽을 더듬어 누군가 불을 켠다
천정에선가 한 타래 빛이 거미줄처럼 늘어지고
날개 가진 것들이 파닥거리며 거미를 잡아먹는다

투명한 방바닥에 푸르스름한 독사들이 발바닥을 간지른다
먹이를 주듯 나는 죽은 말들을 던지며 웃는다
검은 혓바닥들이 치잉칭 내 몸을 감는다
독처럼 고이는 침묵은 뱉어지지 않고
이빨 없는 한 마리 독사가 목구멍을 기어 나와 죽는다

어디서 종이 타는 냄새가 난다
흐트러진 탁자 위엔 누군가의 타다만 입술이 남아 있다
나는 내 것이 아닌 말들을 말아 물려준다
두런두런 피어오르는 목소리들
열쇠구멍으로 들여다보던 누가 심한 기침을 한다

들킨 도둑처럼 달아나고 싶다
꿈틀거리는 벽 속으로 그림자가 끌려가고
달아나는 것을 전제로 한 문이 열렸다,
닫히면 안과 밖이 바뀌어지는 문틈에 꼬리가 끼인다
안에서 자물쇠 채우는 소리가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