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완장 - 이강산

마루안 2021. 11. 2. 23:01

 

 

완장 - 이강산

 

 

그 가을,

나는 모과 도둑으로 살았다

 

어느 외딴집의 모과에 콩깍지가 씌었던 것이다

 

두어 차례 모과나무 곁에서 집을 향해 인기척을 냈지만 감감무소식이었다

문틈으로 누워있는 노파가 보였을 뿐이다

 

나는 노파를 못 본 척,

모과 둘을 땄다

모과의 색에 빠져 남자가 다가서는 줄 몰랐다

 

모과 나무에게 다소곳이 모과를 돌려주고, 남자의 완장을 덥석 받아 들고,

나는 이듬해 가을쯤 완장을 벗을 줄 알았다

 

가을에 모과나무는 베어지고 없었다

모과의 사타구니에 욕창이 생기도록 따지도, 줍지도 않던 남자였다

 

노파의 닫힌 문처럼 모과나무를 벤 까닭이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나처럼 완장을 찬 사람이거나

아예 모과를 알아보지 못하는 어떤 절명의 칼날이 모과나무를 쓰러뜨렸을 것이다

 

남자 몰래 불온한 상상만 했다

 

 

*시집/ 하모니카를 찾아서/ 천년의시작

 

 

 

 

 

 

연두- 이강산


이제 집에 걸어둘 만한 사진을 찍어도 되는가 철거 다큐 따위는 내던져도 되는가, 나는

이제 깃발을 내려도 되는가 눈비에 쭈그려 앉은 광장을 그만 떠나도 되는가, 나는

이제 장돌뱅이 아버지는 지워도 되는가 계급의 지평선, 장터는 잊어도 되는가, 나는

이제 관념으로 기울어져도 되는가 연두에 눈먼 열여섯의 눈을 다시 떠도 되는가, 나는

 

 

 

 

 

# 긴 울림과 여운이 오래 남는 시들이다. 이강산은 시, 소설, 사진에서 일관성 있는 꾸준함이 돋보이는 시인이다. 일 년 넘게 옆에 두고 있던 시집을 이제야 내려 놓는다. 언젠가부터 책도 물건도 모으는 것보다 버리는 재미로 살다 보니 일 년 이상 함께 하는 책은 드물다. "버리면 행복합니다." 미니멀리즘을 지향하며 단촐함으로 살기를 실천하면 비움의 기쁨을 알게 된다. 오래 기억될 좋은 시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