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의 부탁 - 박인식
당신의 자리는 나를 사이에 둔
해의 맞은편이었으면 해
해와 당신 사이에 내가 설 수 있도록
그러니까 나는
햇살 광배로 나를 바라보는
당신에게 스며들었으면 해
바깥에서는 다 지워진 벽화 얼룩 같아도
태초의 말씀을 태초의 빛과 색으로
성당 안에 쏟아붓고 있는
스테인드글라스처럼
당신의 기억을 예언으로 바꿔
환히 비춰줬으면 해
어느날의 해는
한없이 투명에 가깝도록 빨갛게
나를 통과해서
당신의 심장으로
불타올랐으면 해
*시집/ 언어물리학개론/ 여름언덕
어느 늦가을 저녁 - 박인식
나이값에 실패하고
용서에도 실패하고
새벽까지 혼자 마신 술에게도 실패하고
오래된 동네 늙은 뒷골목을 어슬렁거리다 돌아온
전생의 방
언제 어디를 끌고 다녔는지 기억나지 않은 캐리어 위
아무런 그리움도 남아 있지 않아 몇 계절 건너뛰며 나무에 다시 옷 입힐 없는 낙엽처럼 쌓여 있는
허물들이여
나의 늦가을 저녁은 한 마리
매미의 실패 아니면
두억시니의 실패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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