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아흔아홉 개의 표지판이 있는 길 - 최준

마루안 2021. 11. 3. 22:12

 

 

아흔아홉 개의 표지판이 있는 길 - 최준


그 울보, 당나귀를 몰고 가고 싶었지만
할아버지가 먼저 데리고 갔지
비가 내렸다고도 하고
눈이 내렸다고도 하는데
길 나선 할아버지는 당나귀만 끌고 가다
집과 애인을 잃어버리고
어린 당나귀처럼 길 위에서 울었다고도 하는데
눈물이 길을 다 적셨다는데
알고 보니 이건 다 가로수가 지어낸 얘기
심심한 바람이 들려준 유머
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지
그렇게 지나왔다고
내가 말하면 거짓말이지
당나귀를 끌고
애인을 잃어버리고 집 나가 울던
할아버지는 대체 어디로 간 거야, 하고
마차 바퀴에게 묻는다면 그건
길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가로수는 나 지나갈 적에 이미 서 있었던 것 
바람은 처음부터 길 잃었던 것
하므로, 누가 알까 이 길로
대체 몇 개의 슬픔과 절망과 욕설이 지나갔는지
얼마나 눈물겨운 사랑이 좌우로 어긋났는지
그러니 아흔 아홉 개의 표지판은 온통
거짓말투성이
길에서의 추월은
먼저 길을 지우기 위한 안간힘이었을 뿐
돌아보니, 아득히, 어쩌면 이제
알 수도 있겠네
길 위에서 만난 얼굴들
헤어진 사연들
표지판만 나풀나풀
추억으로 나부껴
할아버지 없는
그 많은 무덤들


*시집/ 칸트의 산책로/ 황금알

 

 

 

 

 

 

저녁 일곱 시 - 최준

 

 

어둡기 전에 가야할 곳이 있다는 건

오늘의 무언가로부터 멀어져야 한다는 것

이 비린내 나는 호흡기를

이제 그만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다시는 오늘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것

 

다 노래하지 못한 시간이 하수구로 흘러들었다

 

천사들이 날개를 되찾으러 오르는 계단은

지난 아침을 말짱하게 반짝거리고

하루에 묶인 하루는 차양 아래 펼친 좌판 위에서

떨이 생선들의 무덤을 이루고 있다

 

알고 있다 이제는 모두 이제가 된 이야기들

구태여 확인하지 않아도 모두가 아는 사실들

 

아, 그런데

저녁 일곱 시의 소매 속에 숨긴 게 과연 숨 쉬는 아가미인가

 

돌아갈 곳 있으니 살아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이제

살아 있는 사람들뿐인가

 

돌아온다 다들

되돌아간다

 

 

 

 

# 최준 시인은 1963년 강원도 정선 출생으로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84년 <월간문학>, 1990년 <문학사상>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너 아직 거기서>, <개>, <나 없는 세상에 던진다>, <뿔라부안라뚜 해안의 고양이>, <칸트의 산책로>가 있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문진, 내 어깨에 껌이 - 이자규  (0) 2021.11.05
백 년 여관 - 박주하  (0) 2021.11.05
그네의 목적 - 김가령  (0) 2021.11.03
완장 - 이강산  (0) 2021.11.02
참회록 - 김왕노  (0) 2021.1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