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년 여관 - 박주하
백 년 닳은 문턱에
노란 은행잎 한 장이 내려와 묻는다
잘 지내니?
별빛 돋았던 흔적도 낭랑하게 첨부한
뒷심 깊은 안부를 받으니
침묵에도 한계가 온다
우연을 꺾고 싶은 결심마저 도진다
하지만 어긋난 폐허를 더듬어서 어쩌겠는가
잘 지내지는 못했으나 이젠
무엇이 그리 잘 사는 것인지 답할 일도 아니어서
그저 간절히 묵었던 무덤 같은 방에 들어
백 년 전에 넘어진 구름의 까닭이나 탐한다
늦가을을 풀어
더는 익지 않는 모과 한 알의 사정을
창에 어리는 물방울에 찍어 벽에 기록하는 것이
솔직한 나의 전부,
다만 침묵의 충만함을 뭉쳐서
백 년 후에 다시 찾아들 그림자를
무심히 닦아 허공에 걸어 둘 뿐
*시집/ 없는 꿈을 꾸지 않으려고/ 걷는사람
심심한 날 - 박주하
감나무 한 그루가 유일한 재산인
가난한 옛집 마당에
장대를 들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아이는
이제 죽은 남자가 되었지
바람이 불어와 아이는 어른이 되었고
바람에 흔들리며 때로 눈물을 닦았겠지
지나간 기척들은 이제 더 이상 자라지 않고
마당 끝 어딘가에 묻어 두었을 차가운 하루를
내색 없이 생각하다가
아무도 살지 않는 집터에서
머리만 보이는 사진을 찍었다
바람이 불거나
눈발이 날리거나
나뭇잎이 흔들리면
내가 간 줄 알라던 숱한 인사들
몸이 없어 전하려던
나중의 안부라는 걸 알겠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얼룩처럼 번지는 어스름을 붙잡고
그리운 얼굴들이 가득 들어서는 마당
감나무는 알되 감은 모르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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