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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죽음을 돌보는 사람입니다 - 강봉희

서점에 진열된 수많은 책들을 보면 과연 이 많은 책을 누가 읽을까 싶다. 어차피 나는 책 읽기에 게으른 사람이니 해당은 안 될 테고 단군 이래 최대 출판 불황에서도 이렇게 많은 책이 출간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작은 크기의 책인데도 눈에 확 들어오는 제목이다. 저자의 이력을 보고 바로 구매한다. 이런 책을 만날 때 나는 망설임이 없다. 전문 글쟁이가 아니기에 문장이 매끄럽고 아름다운 건 아니다. 오직 죽은 사람에 대한 깊은 존중이 마음에 와 닿기에 어떤 소설보다 더 흡인력 있게 술술 읽힌다. 저자 강봉희 선생의 이력을 보자. 1953년생인 저자는 1996년 40대 중반에 암에 걸렸다. 병원에서 석 달 시한부 판정을 받았으나 극적으로 살아났다. 선생은 병실에서 다짐했다. 내가 죽지 않고 살아나간다면 아무에..

네줄 冊 2021.11.22

일도 열심히 하고 엄청 착했다 - 박지웅

일도 열심히 하고 엄청 착했다 - 박지웅 척은 이웃집에 살지만 이웃인 척은 안 했어요 친절과 파괴의 어원은 같아요 요즘은 이웃으로 살지요 척이 방문을 열면 입을 벌리고 나는 빙그르 돌아요 나더러 악어 같대요, 물론 아니죠 침대가 내 구역일 뿐이죠 여기에서는 웬만하면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거든요 밤은 내 밥벌이예요, 나는 여권도 없는 스트립 걸 홀딱 벗고 들어갈까요? 사랑이라는 세계 나는 잘 몰라 먼 데를 바라보는 사람은 착하거나 외로워요 인간은 모두 굶주림에서 출발했어요 내가 반한 것은 사랑이 아니라 그가 데리고 온 거짓말 고마워요, 사랑해요 그 말을 들었으니 내 귀는 충분히 잘 살았어요 가을이 등을 돌릴 때 첫눈은 내려요 생년월일이 없는 몸통을 우리는 눈사람이라고 불러요 나는 밤마다 눈사람이 되는 거죠..

한줄 詩 2021.11.21

입술의 향기 - 이시백

입술의 향기 - 이시백 살다 보면 이사를 다닌다. 이유야 저마다 다르지만 우리는 터전을 간혹 바꾼다. 서식지를 안전하게 두려는 동물적 감각 살다 보면 다투고, 서운하고 아쉬움이 남는 흔적이 사는 곳마다 있다. 떠돌며 가장 섭섭한 건 추억의 공간이 사라지는 것 또한 포기해야만 하는 미련도 얼마나 많은가 세상이란 떠나는 길을 늘 염두에 둬야 한다 사는 동안 지상의 가치는 뭘까? 생을 다하는 날까지 고운 말을 해야 한다. 전달하는 말에서 꽃향기가 나야 한다. 이것이 살아있는 날에 최고의 미덕이다. *시집/ 널 위한 문장/ 작가교실 상호보완 - 이시백 물이 흐르는 곳을 바라본다. 수천 년 흘렀어도 지금도 흐르는 강물 나는 멀리서 가마우지의 적시는 발로 대신한다. 예전부터 발을 담그고 생활의 터전으로 살았을 가마..

한줄 詩 2021.11.21

보헤미안 랩소디 - 최서림

보헤미안 랩소디 - 최서림 개미동굴만한 지하방에 세 들어 산다. 가을빛이 피곤하고 우울해 지네처럼 숨어 지낸다. 보헤미안 랩소디처럼 흩날리는 노란 은행잎도 그의 시들어가는 감각을 깨우지 못한다. 안으로 걸어 잠근 마음 문을 두드리지 못한다. 세상이 저만치 따로 굴러간다. 흔들리지 않는 바위도 못되고 세상을 향해 날아가는 짱돌도 되지 못하고 밟히면 부스러지고 마는 부스럭돌이 되고 말았다. 담배냄새 짙게 밴 이불 속에서 모가지만 빼들고 있다. 깡그리 싸질러버리고 싶은 분노도 삭아져버렸다. 창 한 번 휘둘러보지도 못하고 모비딕 아가리 같은 세상 속으로 삼켜지고 있다. *시집/ 가벼워진다는 것/ 현대시학사 빗장 - 최서림 과일 하나도 유기농만 가려서 먹는 그들은 스펀지처럼 보드랍고 상냥하다. 도우미도 강아지도 ..

한줄 詩 2021.11.20

외로운 사람은 외롭게 하는 사람이다 - 이현승

외로운 사람은 외롭게 하는 사람이다 - 이현승 마치 백년 전에도 태극기를 흔들었던 것처럼 오늘의 거리에는 노인들이 많다. 개항과 자주가 붙었다 떨어졌다 했던 백 년 전처럼 태극기 옆에는 유대의 깃발들이 보이고 박근혜 석방, 문재인 OUT을 앞뒤로 새긴 피켓을 향해 박근혜 X X X ! 인도 쪽에서 누가 쏘아붙이자 노인의 눈에서 다시 화염이 일었다. 백두산은 휴화산이 아니라 활화산이었다. 천년 전에 한반도를 1미터 두께로 뒤덮었던 화산재조차 어떤 풍요의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죽은 풍뎅이를 잘라 나르는 개미떼를 보듯 자연의 편에선 다 합리화가 가능하고 잘못된 선택과 행동조차 교훈을 남긴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허기보다 착찹한 진실로 남는다. 지난 백 년 동안 제국주의에 맞서고 민주주의를 위해서 싸웠지만 싸우..

한줄 詩 2021.11.20

밥심 - 강미화

밥심 - 강미화 어금니 채워진 사람은 밥힘이라고 하고 앞니 빠진 사람은 밥심이라고 하던데 이 빼고 틀니로 바꿀 때가 되다 보니 밥심이 맞지 싶다 밥알 하나에 팔십 번 손이 가야 한다는 옛말이 말뿐이것냐 논두렁 밭두렁 걸어보지 못한 부지깽이도 모든 일엔 정성을 드려야 한다는 뜻 아닌가 싶다 미안하다 빵을 더 먹였지 싶다 잘못은 나만 할 테니 밥힘으로 살어라 달리 보약이냐 심덕 곱게 써서 살다 보면 약이 되는 거여 *시집/ 오늘 또 버려야 할 것들/ 문학의전당 지팡이 - 강미화 숟가락 무거운 것도 싫고 더 나이 들면 무얼 가지고 살까 싶다 명아주 말이다 젊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솟구치다, 흔들리다 뭐라도 피워볼까 대 세우다 도로 아미타불 된 거 아닌지 가슴팍을 찌고 말리고 찌고 말리고 수십 번 당하고 사신..

한줄 詩 2021.11.18

여수 바윗골 - 육근상

여수 바윗골 - 육근상 자귀나무 꽃이 도깨비불처럼 창호에 흔들리고 있는 것이어서 나는 마당으로 나와 헛간을 변소를 텃밭을 둘러보다 장꽝 옆으로 난 조붓한 대밭 길 따라 강 마을까지 왔다 지금은 깊은 밤이라서 개 짖는 소리보다 먼 데서 넘어왔을 빗소리 더욱 깊게 드러나 매어놓은 쪽배 곁에 물빛으로 출렁거리고 있는데 강 건너 여수 바윗골 징 소리 가뭇하게 들린다 누이는 차가운 마룻바닥에서 고깔 쓴 노파가 시키는 대로 삼배하고 있을 것이다 내세를 생각하다 북받치는 듯 흐느끼고 있을 것이다 나는 여수 바윗골 다녀온 날이면 온몸 힘 빠지고 불덩이 삼킨 듯 목 타올라 엄니 모시는 일에서 비켜나 뱃전 맴돌고 있다 어느 한 곳 온전히 정착하지 못하고 밖으로만 떠도는 내 쓸쓸함이나 외로움은 출렁거리는 물결 소리로 자란 ..

한줄 詩 2021.11.18

여린히읗이나 반치음같이 - 김용태 시집

요 근래 우연히 선택한 시집에 풍덩 빠졌다. 제목은 다소 낯설고 어렵지만 좋은 시로 가득하다. 갈수록 시가 자극적이거나 달달해져서 겉만 화려하고 내용물이 부실한 시집이 많은데 이 시집은 낯선 포장지에 비해 내용물이 영양가 만점이다. 이름 없는 시인의 첫 시집이 깊은 울림을 준다. 누굴까. 하늘의 별만큼 많기도 한 시인 중에 김용태라는 사람은 이 시집으로 처음 듣는다. 내가 시를 열심히 읽는 편이지만 시인들 만큼 정보가 있겠는가. 문예지를 정기적으로 구독하는 것도 아니고 시를 써 본 적 없기에 지인들과 시에 관한 대화는 더욱 없다. 먹고 살기 바쁜 와중에 틈틈히 시집 코너에서 까다롭게 고른 시집이다. 그게 내가 시인을 알아가는 최선의 방법이다. 파란만장은 아니어도 파란백장은 겪었기 때문일까. 나도 이제 연..

네줄 冊 2021.11.18

예약된 마지막 환자 - 이윤설

예약된 마지막 환자 - 이윤설 나의 병은 주치의의 주특기, 삼십 년째 이 원인 모를 난치병을 연구했고 당연히 국내 유일한 권위자로 성장했다 그에게 나는 오늘 혼이 났다 먹어서는 안 될 사슴뿔 고아 짠 용을 남몰래 복용했기에 그의 예단대로 통증은 격심했고 불면은 깨진 유리처럼 저항력을 손상시켰다 두 손을 모아쥐고 머리를 조아리며 의사의 말을 따르지 않는 환자는 치료할 수 없다는 극단의 처방을 거두시기를 앙망하느라 내 눈자위가 떨잠처럼 으달달 떨렸다 차트를 갈겨쓰는 창백한 흰 가운의 그는 환자를 정면으로 쳐다보는 법이 없다 나는 소독된 햇빛이 비치는 책상 위 모형 범선을 보고 있었다 펜을 멈추지 않은 채 그는 말했다 제 의료 인생은 선원들과 함께한 험난한 항해와도 같았죠 닻을 내리기 전까지 무엇보다 선원들과..

한줄 詩 2021.11.17

가당찮은 일들 - 김한규

가당찮은 일들 - 김한규 웃어서 복이 온다면 누가 가로채는가 하루 종일 서 있는 웃음을 커피 자판기에서 컵도 안 나오고 물만 흐르는 날이 어디 한두 번인가 어디에 대고 물어볼 것이 없는 생이 흘러들어 가는 하수구에서 생쥐가 올라오고 발목이 물린다 악착같이 습지에서 바르작거리는 월세의 빚진 꿈이여 일 년 거치로 잠시 죽음을 미뤄 놓고 나간 아침에 비가 내린다 아무것도 건질 것이 없는 구덩이가 놓인다 걷지 못한 빨래 뒤에서 문 뒤에서 벽 뒤에서 끊어진 가스 호스 아래서 무거운 이불 속에서 썩고 있는 시체를 모르는 채 넘어가는 하루를 웃으면서 셀 수 있는가 우리라고 부르며 묵살당한 얼굴로 뜯겨진 이름에 걸려 엎어지는 인간이라는 이상한 상태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은 일어나는 것이지 매를 맞는 기분으로 웃음을 유발..

한줄 詩 2021.1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