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멀리서 오는 점성 - 정철훈

마루안 2021. 11. 6. 21:57

 

 

멀리서 오는 점성 - 정철훈

 

 

오늘은 길을 걷다가

허공을 향해 눈을 부릅떠보았다

아주 먼 허공이 아니라

머리에서 한 뼘 위 허공

그러면 내 눈에 습기가 엉켜 드는 것이다

 

나는 습기가 아주 먼 곳에서 왔다는 것을 안다

내가 기다리는 건 어떤 점성일 게다

멀리서 오는 점성

어제는 친구와 술을 마시며

왜 한 번도 길을 잃어버린 적이 없냐는

말을 들었다 통렬함이 없다는 말도 들었다

 

그건 좀체 자세를 흩뜨리지 않는

내 소시민적 기질을 두고 하는 말이다

나에겐 울부짖음이 없고 남루가 없고

방황이 없고 상실이 없고 비에 젖은

무의식의 비애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건 모두 눈물과 관련되어 있다

내가 기다리는 건 멀리서 오는 점성이고

남들은 그런 나의 기다림을 모른다

그럴지도 모른다

 

 

*시집/ 가만히 깨어나 혼자/ 도서출판 b

 

 

 

 

 

 

가을 모기 - 정철훈

 

 

뜬눈으로 밤을 새우다 보니

야반도주하는 심정이 된다

생활을 버리고 떠나가고

또 다른 생활이 기다리고 있겠지

 

남쪽으로 가야 할 이유는 없지만

남쪽으로 가고 싶다

자식들도 다 커서 따라오지 않을 것이다

분명 같이 가고 있었는데

뒤돌아보니 혼자다

 

길은 휘어진다

멀리 발전소 굴뚝에서 석탄을 녹인 연기가

해안가 마을로 퍼진다

추위는 몰려오고 아직 짐승의 더운 피를 빨지 못한

가을 모기가 자꾸 들러붙는다

 

모기에게 물린 상처를 긁다 보니

붉고 긴 손톱자국이

내 안에서 떠오른 짐승 같다

좀 더 남쪽으로 내려갈 것이다

힘없는 가을 모기를 동무 삼아

 

 

 

 

 

*시인의 말

 

진인은 외롭다고 한다. 외로움을 찾아 지닌다고 한다. 나는 진인도 뭣도 아니지만 그 말뜻을 깊이 새길 수는 있다.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혼자만의 싸움. 나를 혹사시키는 혼자가 좋다. 외로움이 좋다. 캄캄한 우주에서 해도, 달도, 나도 혼자다.

 

혼자만의 나를 탕진하고 돌아오니 광이 텅 비어 넓어 보이는 공복이 좋다. 그래, 나는 비로소 나와 작별할 수 있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