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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 김진규

일기 - 김진규 익숙함 때문에 찢어버린 문구가 어느 날 늑골처럼 아늑하다 느낄 때 영원히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말보다 더 아름다울 때 그런 날이 누구도 모르게 사라지고 싶은 날 어디론가 계속 옮겨 다니는 오늘이 지나 아직은 행복한 내일의 마음을 끌어다 쓰고 발바닥을 손바닥으로 닦아내며 내 기분을 거기 전부 적어둔다 이름이 적히지 않은 건 영원히 내 것이 아니듯 등 뒤로 떠나는 얼굴들은 하나같이 표정이 없고 어떤 날에는 며칠쯤 일찍 찾아올 불행을 느낀다 그런 날에는 고작 나도 혼자 뛰어내릴 수 없는 절벽쯤은 가지고 있다고 말해보지만 허나 발을 구르면 빛나는 비명들에 대해 불이 켜진 방에 가만히 앉아 누구도 불러주지 않는 지난날에는 숙취보다 오래가는 불안함에 대해 꾹꾹 눌러썼지만, 알아볼 수 없는 글씨 ..

한줄 詩 2021.11.29

슬퍼할 일들이 너무 많다 - 김익진

슬퍼할 일들이 너무 많다 - 김익진 슬퍼할 일들이 너무 많다 이미 지나간 날들이 얇은 지갑에 묶여 있던 또 하루를 잎이 다 떨어진 산허리 위로 끌고 지나간다 초겨울 추위에 얼어있는 낙엽은 기어처럼 흔들리고 달리는 자동차 울음이 목젖까지 꽉 찬 오후다 삶은 알 수 없는 미래 흑백이거나 흐린 음영으로 별 무리와 함께 가는 길인데 끼워야 할 단추가 너무나 많다 조수와 달이 배합한 삶 회전하는 마법의 순간들은 되돌아갈 길이 없으니 타인에게 말이나 걸어본다 우리는 단 한 번 사는데 이 삶은 북적대는 비둘기장이다 일요일 오후에는 슬퍼할 일들이 너무 많다 *시집/ 사람의 만남으로 하늘엔 구멍이 나고/ 천년의시작 불면증 - 김익진 태양이 고정되어 있다면 낮과 밤이 있을까 달이 지구보다 크다면 지구가 달 주위를 돌까 지..

한줄 詩 2021.11.27

그 후 - 박민혁

그 후 - 박민혁 슬픔을 경제적으로 쓰는 일에 골몰하느라 몇 계절을 보냈다. 나를 위탁할 곳이 없는 날에는 너무 긴 산책을 떠난다. 목줄을 채운 생각이 지난날을 향해 짖는 것하며, 배변하는 것까지 묵묵히 지켜보았다. 그건 거의 사랑에 가까웠지만, 결코 사랑은 아니었다는 식의 문장을 떠올려 본다. 모든 불행은 당신과 나의 욕구가 일치하지 않는 데서 온다. 병구완이라도 하듯 아침과 저녁은 교대로 나를 찾아왔다. 한마디 상의도 없이. 좋은 냄새가 나는 아기를 안아 주고, 도닥여준다. 아기를 좋아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아름다운 것은 인생이 아니라 기어코 비극적이려는, 고삐 풀린 그것을 길들이는, 인간이다. 집에 놀러온 신은 내 일기를 들춰보다가, "신이란 신은 죄다 불량품인지, 뭘 가지고 놀든 작동이 잘 안 돼..

한줄 詩 2021.11.27

길 위의 방 - 홍성식

길 위의 방 - 홍성식 소진한 기력으론 신(神)을 만나지 못한다 황무지에 달이 뜨면 갸르릉 도둑고양이 울고 집 나간 누이는 오늘도 돌아오지 않았다 식은 밥상에 마주 앉은 데드마스크들 시간은 석고처럼 창백하게 굳고 조롱의 숟가락질, 싸늘한 만찬이 끝나면 표정 없이 젖은 침대에 드는 사람들 어쨌거나 창 너머 달은 또 뜨는데 째각대는 시계 소리에 맞춰 계단을 올라 어둡고 축축한 방, 문을 열면 나신의 엄마 그녀로부터 시작하는 하얀 비포장길 꿈에서도 달맞이꽃은 흐드러졌는데 길을 잃은 자, 길 위에는 방이 없다. *시집/ 출생의 비밀/ 도서출판 b 불혹 - 홍성식 길 위에서 길을 찾다 길에 눕는다 메마른 얼굴을 쓰다듬는 유년의 바람 해서, 내내 낯선 길만이 매혹적이었다 열아홉, 스트리퍼의 젖꼭지를 본 날 우주는 ..

한줄 詩 2021.11.26

나는 울었네 - 주현미

나는 몰랐네 나는 몰랐네 저 달이 나를 속일 줄 나는 울었네 나는 울었네 나루터 언덕에서 손목을 잡고 다시 오마던 그 님은 소식 없고 나만 홀로 이슬에 젖어 달빛에 젖어 밤새도록 나는 울었소 나는 속았네 나는 속았네 무정한 봄바람에 달도 기울고 별도 흐르고 강물도 흘러 갔소 가슴에 안겨 흐느껴 울던 그대는 어딜 가고 나만 홀로 이 밤을 세워 울어 보련다 쓸쓸한 밤 야속한 님아 #신기하지, 무슨 노인네처럼 이런 노래가 좋아지는 걸까. 섹소폰이든 아코디언이든 구슬픈 뽕짝 선율이 술기운 퍼지는 것처럼 혈관 속으로 파고드는 가을 밤이다. 어릴 때부터 슬픈 뽕짝이 좋았던 걸 보면 아마도 무당의 피가 흐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정신 없는 전염병 시국에도 가을은 왔고 잠시 머물던 가을이 서둘러 떠났다. 일찍 찾아온 한..

두줄 音 2021.11.25

폐막식을 위하여 - 서윤후

폐막식을 위하여 - 서윤후 ​ 이 무대를 끝내기 위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서둘러 빛을 꺼내려고 벼락을 샅샅이 뒤지던 날에 기록한 망가진 그날의 일기가 오늘 무대의 조명을 갖춘다 인형탈을 벗고 쉬는 용서를 보았을 때 지혈되지 않던 밤의 기쁨을 알게 되고 함부로 깨웠다가 영영 잠들지 않는 자명종을 목에 걸어주고는 꿈에서만 참견하는 악몽이 되어주기로 한다 익숙하고 끔찍한 친절함으로 골절된 영혼의 인형극에 몰입하며 차례를 기다린 건지도 바닥난 사랑에도 이 무대는 영영 끝나지 않는다 어느 날의 독백을 지우고는 삶을 퇴고하게 된다 다음 행복을 모사하는 것도 슬픔이 가진 배역이었기에 머지않은 출구를 열지 못하고 벼랑 끝에 서 있다 무대에 두고 온 이 시는 이렇게 끝이 난다 누구도 버린 적 없어서 아무도 끝까지 읽..

한줄 詩 2021.11.25

증강현실 - 이문재

증강현실 - 이문재 뛰지 말라 전파를 더 많이 맞는다 가만히 서 있지 말라 몸에 부딪쳐 부서지는 전파가 무릎까지 쌓인다 걸어다니지 말라 옷이 전파에 절어 너덜너덜해진다 살갗이 전파에 맞아 시퍼렇게 멍든다 숨 쉬지 말라 전파가 허파꽈리에 가득 차 딱딱해진다 눈 뜨지 말라 망막 안쪽이 긁힌다 전파 전파 전파가 쏟아진다 위아래 앞뒤 왼쪽 오른쪽 전방위에서 초강력 전파가 쉬지 않고 달려든다 폭풍처럼 폭우처럼 폭설처럼 쓰나미처럼 화산처럼 지진처럼 눈사태처럼 정전처럼 감전처럼 단전처럼 누전처럼 신종플루처럼 광우병처럼 조류독감처럼 구제역처럼 전파가 지구를 뒤덮고 있다 옷을 털지 말라 전파 부스러기 떨어진다 물로 씻지도 말라 전파가 몸을 관통하고 있다 실제 상황이다 *시집/ 혼자의 넓이/ 창비 사랑과 평화 - 이문재 ..

한줄 詩 2021.11.25

묻는다 물어야 해서 - 안태현

묻는다 물어야 해서 - 안태현 머잖아 겨울이 오면 마스크를 벗고 내 반의 얼굴을 드러내도 되나 앙상한 늑골 사이로 주린 바람이 달려가는 도시의 귀퉁이 탁자에 희박하게 앉아 얼큰한 육개장을 마음껏 먹어도 되나 집 냄새에 찌든 사람이 모처럼 노선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갔다가 그곳에서 묻혀온 무덤이 따로 없더라는 진흙 같은 적막함 여기까지 왔대 느닷없는 소름이 이웃 아파트 단지까지 밀고 오면 나는 뒷문을 하나 더 만들어 놓는다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짐승이 들뜬 분위기를 퍼뜨려놓고 이제나 저제나 방심을 기다리는 왕국의 동토 지대를 쏜 살보다 빠르게 건너갈 수 있나 만화경을 돌린 듯이 모든 걸 헝클어버린 이간질 같은 안개 숲 기울어진 것은 균형을 찾으려 수십 번은 흔들리고 자작나무처럼 하얀 껍질을 벗으면 그 사이 몇..

한줄 詩 2021.11.22

위험한 의식 - 김윤환

위험한 의식 - 김윤환 태초에 세족식은 없었다 사람이 만든 거룩함이란 발바닥에 찍힌 생애의 지도가 흐물흐물 풀어지는 쓸쓸한 주문(呪文) 같은 것 확인되지 않는 청결의 율법 발보다 깨끗한 손이 아니라면 타인의 발을 씻는 일은 언제나 절벽의 의식 노아의 홍수 이래 무균의 샘은 없었다 정화수에 비친 제사장의 얼굴 그 눈에 티끌은 어찌하랴 새벽을 창조한 신이 사람의 발을 씻는 날 한번만 허용되는 그 위험한 의식에서 나는 내 발에 묻은 지도를 아프게 아프게 떼고 있었네 발을 씻는다는 것은 껍질을 벗겨낸다는 것 발등에 떨어진 하늘을 건진다는 것 발목을 떼어 하늘로 보낸다는 것 *시집/ 내가 누군가를 지우는 동안/ 모악 주일서정(主日抒情) - 김윤환 저기 휘청이며 오는 교인들의 날숨소리를 주워 담는 예배당 계단 날마..

한줄 詩 2021.11.22

갈매기 - 김미조

오랜 기간 전통시장에서 생선 장사를 해온 오복이라는 여성이 있다. 비린내 맡으며 장사를 했고 생활력 없는 남편과 두 딸을 위해 가정일까지 하느라 허리가 휠 지경이다. 평생 장사를 했던 시장이 재개발 지역으로 지정되면서 상인들끼리 모여 투쟁 중이다. 어느 날 상인들과 데모를 마치고 회식을 가졌는데 술에 취한 오복을 그 상인 단체 간부가 성폭력을 한다. 하혈로 바지가 젖을 정도다.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난망한 중에 사연 모르는 딸은 엄마가 다시 생리를 시작했다고 놀린다. 오복은 고민 끝에 큰딸에게 사실을 말한 후 고소를 하기로 결심한다. 이때부터 60대 아줌마의 투쟁이 시작된다. 성폭행 당사자는 증거 있느냐고 발뺌을 하고 시장 사람들 또한 젊은 남자가 60 넘은 여자를 성폭행 했겠느냐고 비아냥댄다..

세줄 映 2021.1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