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헌 신발 - 박상봉

마루안 2021. 11. 10. 22:10

 

 

헌 신발 - 박상봉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네

살아온 날을 세어보니
기록할 만한 일도 없구나

청춘은 어디로 갔나
내가 세운 공장들은 어디에 있나

밤늦도록 눈 비비며 보던 책들
밑줄 그은 문장의 길 따라
지치도록 구름 위를 달려왔으나

끈이 너덜너덜해진 가방 속
세월을 낭비한 죄의 형량만 무겁네

직장생활 십팔 년 아무리 계산해 봐도
한 푼어치 남은 것 없는 밑지는 장사였네

내 집은 어디에 있나
문밖에서 여러 날 지내는 동안
돌아갈 집을 잊어버렸네

내 몸은 어디로 갔나
사람들이 자꾸 낯설어지네

불러낼 친구 하나 없는 저물녘에
발그레 술이 오른 노을과 마주 앉아


살아온 날의 뒤안길 돌아보니
뒤축이 닳은 헌 신발만 남았네

 

*시집/ 불탄 나무의 속삭임/ 곰곰나루

 

 

 

 

 

 

늦가을 단풍 - 박상봉

 

 

내 나이 어느덧 해가 지듯 저물어간다

 

새벽 찬 서리에 기침 소리 잦아지고

돌아보면 외진 산길 울퉁불퉁 걸어온 인생

 

험한 세월 비바람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며

강바닥에 뒹구는 돌같이 살았다

 

한때 빛나던 시간 아름다운 색깔을 지녔으나

강물에 첨벙 발 담그고 들어가 돌 하나 건져보면

어느 길에나 널린 평범한 돌덩이 까칠하게 만져질 뿐이다

 

세찬 빗줄기 맨몸으로 맞으며 뛰고 달리던

가슴이 펄펄 끓던 청년은 간 곳 없고

 

희어진 머리카락, 넉넉한 뱃살에 한숨짓고

눈물 떨구며 우울증에 빠지기도 하지만

 

이제는 절로 고개 숙여지는 무르익은 나이

저만치 창가에 차오르는 햇살부터 느낌이 다르다

 

쨍하고 어수선한 한여름의 그것보다

어딘가 모르게 한풀 꺾인 뉘엿뉘엿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가을

 

지천명의 가을은 오금 저리게 아름답고

한껏 보기 좋은 환한 날이다

온 산 다 껴안고 나서 비로소 물드는 절정의 단풍나무 숲으로

무거운 짐 벗어놓고 가야 할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