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환절기 - 피재현

마루안 2021. 11. 11. 22:32

 

 

환절기 - 피재현


어제는 늦은 가을비가 종일 내리고
밤에는 바람도 거세게 불어 나는 조금 쓸쓸했다
바람이 동네 골목이며 나뭇가지 사이를 지나가면서
내지르는 소리는 이별한 사람들의 부음 같아서
그냥 나도 모르게 허공을 바라보고 앉아
그 사람의 명복을 빌어 보게 되는 것이다
바람은 아침까지도 제법 불었는지
문밖에 나서는 걸음이 어설펐는데
나뭇잎들이 하룻밤 사이에 다 떨어지고
빈 가지들이 나보다 더 쓸쓸하게 서 있었다
그중 마로니에는 큰 잎들로 가려졌던 앙크란
맨몸을 다 드러내고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는데
나도 황급히 눈을 돌리고야 말았다
주인 객 할 것 없이 사람만 보면 무턱대고 짖어대던
앞집 개도 딴 데로 돌아앉아 있었다
가을인가 싶더니 단풍 구경 한번 못 하고
겨울이 왔구나 나목들이 긴 겨울을 저렇게
우두커니 서 있겠구나
일하러 가는 길이 더욱 쓸쓸하여 몇 번
옷깃을 여미어도 보았다
겨울에 헤어진 애인들의 얼굴이 묻어 왔다
잠긴 목을 가다듬고 이름을 불러 보려다 그만두었다
아침 안개가 걷히고 낮에는 바람도 멎어
푸른 하늘이 드러나 잠시 따뜻하기도 하였으나
나뭇잎을 한꺼번에 다 떨어뜨린 바람에 대한
야속함이 가시지 않아 나는 여전히 쓸쓸하였다
계절은 어김없이 가을에서 겨울로
또 겨울에서 봄으로 가고 있는 길일 테고
나는 나의 쓸쓸함이 나이를 먹어 가는 탓이라고
나이 탓을 하고서야 덜 쓸쓸해져서
주섬주섬 겨울옷을 꺼내 놓고 저녁밥을 먹었다


*시집/ 원더우먼 윤채선/ 걷는사람

 

 

 

 

 

 

돈 - 피재현


엄마는 병원에 누워서 제일 먼저
돈 숨겨 둔 곳을 가르쳐 주었다

냉장고 밑바닥 물받이에는 오백 원짜리가
장독 밑에는 아버지 돌아가시고 뒤늦게 들어온
이웃 부좃돈이 봉투째 숨어 있었다

오래 비워 둔 집에서는 엄마가 말하지 않은
여러 곳에서 돈이 나왔다
싱크대 깔개 밑에서는 제법 큰돈이 튀어나오기도 했다

돈을 믿고 살았구나

남편도 자식도 아니고
엄마는 돈을 믿고 살았구나
악착같이 돈 모으는 재미로 아픔을 잊고

돈 좀 모이면 니 신세 안 진다
큰소리도 치며 버텼구나
노령연금 올려 준다는
문재인이를 그렇게 좋아했구나

일백칠십이만 원
통장을 만들어 떨리는 엄마 손에 쥐여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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