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지구라서 다행이야 - 고태관

마루안 2021. 11. 10. 22:01

 

 

지구라서 다행이야 - 고태관

 

 

바닥을 껴안고 잠든다

홍대입구역 8번 출구로 올라가는 사람들

간혹 동전을 내려놓는다

 

돌아누운 그가 지구를 둘러맨다

반대편 대륙의 기린

긴 목에 매달린 머리를 가누려 뒷다리를 구부리고

자전이 멈춘 시간

가만히 펼쳐진 철새의 날개가 드리워진다

목적지를 찾는 부리의 여정

모빌이 되어 돌아온다

 

걸음마 내딛는 아이

계단 하나 오르고 안간힘 다해 휘청거린다

울음 열기 직전

각자 반짝거리던 별자리가 떨린다

도착한 철새를 올려다보다가

나뭇가지에 매달린 잎을 씹는 어린 기린

현기증으로 기울어진다

아이는 엄마 품에 안겨 떠난다

 

팔을 뻗어 동전을 모은다

지구라서 다행이야

 

 

*시집/ 네가 빌었던 소원이 나였으면/ 걷는사람

 

 

 

 

 

 

동그라미 - 고태관

 

 

웅크리면 따뜻하다

 

엎어 놓은 버스 바퀴를 탁자 삼아 버스기사가 도시락을 먹을 때

 

나는 어깨와 허리를 벽에 붙이고 똑바로 선다

몇 발자국이면 닿을 식사를 보다가 턱을 당긴다

나는 어긋나지 않았다

 

어둠을 물레질해 도착한 차표가 주머니에서 허기처럼 구겨졌다

목적지가 번지다 못해 지워졌다

 

주파수를 놓친 라디오 소음과 엔진 소리에 섞인 숨

거울처럼 깨끗하게 닦인 밤의 차창이 기사와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단둘이서 내린 막차

식사를 끝낸 뒷모습이 멀어진다

 

대합실 의자를 끌어와 나란히 앉아

누군가의 라디오였던 밤

어깨를 내어주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거울인 적이 있었다

 

식탁이었던 바퀴에 두 발을 올리고

의자에 기대어 잠을 감아올린다

첫차를 기다린다

 

두 손으로 무릎을 안고 구부러진다

탁자는 달리지 않는다

라디오와 거울은 웅크리지 않는다

 

반듯하게 누우면 잠들지 못하는 버릇

바라보는 쪽이나 등진 쪽에 누가 있을 것만 같아서

눈을 감으면 따뜻하다

 

 

 

 

# 고태관. 래퍼 피티컬(PTycall). 1981년 울산에서 태어나 1999년 고등학교 락밴드에서 래퍼로 활동했다. 2000년부터 대학에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2007년 결성한 시를 노래하는 '트루베르'에서 리더로 활동했다. 2020년 5월 15일 세상과 작별했다. 시집 <네가 빌었던 소원이 나였으면>은 그의 1주기에 나온 유고시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