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아버지의 죽음에선 박하 향기가 났다 - 홍성식

마루안 2021. 11. 9. 22:31

 

 

아버지의 죽음에선 박하 향기가 났다 - 홍성식


도둑담배를 피우러 간 병원 계단
실연한 동료를 안아주던 간호사와 눈이 마주쳤다
아버지는 여섯 달째 입원 중
녹슨 목련이 오래도록 나무를 붙들던
그해 봄은 지나치게 길었고

마약성 진통제로 견디는 노인
키가 큰 레지던트의 짧은 치마는 벚꽃 빛깔이다
아버지는 여섯 달째 입원 중
모래 섞인 바람이 창을 두드리면
흐린 눈망울이 여자의 다리를 훑고

백 년 같은 하루가 끝나가는 저물녘
녹두죽을 끓여온 엄마가 소변 주머니를 비운다
아버지는 여섯 달째 입원 중
손을 잡고 무슨 말인가를 하려면
모진 힘으로 뿌리치며 자꾸만 돌아눕고

샤워도 양치질도 잊은 지 오래
행여 숨이 끊겼을까 다가가 호흡을 확인한다
아버지는 여섯 달째 입원 중
다른 세상에서 묻혀온 냄새인 듯
머리칼과 목덜미에선 박하 향이 났고

 

 

*시집/ 출생의 비밀/ 도서출판 b

 

 

 

 

 

 

망자(亡者)의 명함 - 홍성식


먹은 귀로 걸어가는 어두운 골목
한때 휘황하게 생을 밝히던 네온사인 모두 꺼지고
어둑한 길의 끝머리에 선 낯선 사내
손짓해 그를 불렀다
두려움보다 반가움이 먼저 왔다

사라진다는 것이 마냥 쓸쓸한 일이기만 할까
제 몫의 즐거움만큼이나 버거웠던 고난의 무게
물 먹은 솜을 짊어진 당나귀의 그것마냥 힘겨웠다
춤추며 노래하는 장미의 나날이 저 너머에 있다면
어찌 예수의 부활만 아름다울 것인가

노래가 아무 것도 될 수 없는 지상에서
노래가 모든 것이 되는 천상으로

그는 떠나갔다. 총총한 걸음으로
소리 높여 콧노래 부르며 사라진 일흔둘의 여윈 사내
흔들리고 때론 술렁였던 생애
망자가 지상에 머문 흔적을
명함 한 장만이 또렷이 증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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