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눈 내리는 충무로 인쇄골목 - 전장석

마루안 2022. 1. 2. 19:27

 

 

눈 내리는 충무로 인쇄골목 - 전장석

 

 

첫눈이 왔을 뿐인데

쇄출기가 고양이 발걸음처럼 느릿느릿해지고

 

첫눈이 왔을 뿐인데

갑자기 허기가 져 순댓국에 소주를 시킨다

 

어쩌다 첫눈이 왔을 뿐인데

흐린 창밖엔

알 수 없는 그림자가 오래 서성이고

 

첫눈이 오자 인쇄골목 사람들은

그동안 망설이던 기차를 타고

고향의 설원을 향해 달리는 꿈을 꾼다

 

늙은 쇄출기가 밤새 콜록이던 골목골목에

아픈 상처를 더듬듯

눈은

낡은 입간판을 어루만지고 천막 위에

흰 천막을 덮는다

 

그곳에 맨 처음인 듯 쓰여진

눈의 마지막 문장에다 마침표를 찍으려

들뜬 사람들의

분명한 발자국이 지워지고 다시 찍히고 있다

 

어쩌다 첫눈이 왔을 뿐인데

늙은 암고양이

밤새 낡은 쇄출기 위에서 내려올 줄 모르고

 

좌우 막힘없이 몸놀림 가볍던 지게차는

눈송이 하나에도 무거운지

혼곤하게 잠들어 있다

 

 

*시집/ 서울, 딜큐사/ 상상인

 

 

 

 

 

 

낙원삘딍 - 전장석

 

 

저 오래된 악기의 지붕은 악어가죽으로 덮여 있다

 

뱃속에는 미처 소화하지 못한

잡다한 소음이 부글부글 끓고 있다

 

악기 상점들은 건물의 오케스트라 단원이다

 

관악기와 현악기의 발성연습이 한창인 낡은 의자와

연약한 구조물의 성대를 받쳐 들고

오를 때마다 고음으로 삐걱이던 나무계단과

레퍼토리가 저음인 환풍구 소리가 앙상블을 이루고 있다

 

자발적으로 악어의 입속으로 들어가

세상의 분별을 찾아 악기를 장만하던 사람들

창가의 노을이 세레나데를 연주하는 동안

그들은 정말로 낭만주의자가 되었을까

 

이 도시의 늪지대에서 반쯤 얼굴을 가리고

고장 난 심금을 유혹하는 종로3가 낙원삘딍

 

누구나 이곳을 지날 때면

한쪽 다리 정도는 잃을 각오를 해야 하는데

진열장 속의 바이올린을 꺼내어

용감하게 악보 없는 세상을 연주하던 그가 보고 싶다

 

금빛 문양의 간판이 아직도 휘황한

연미복을 차려입고 납작하게 지휘봉을 치켜올리는

검버섯 핀 저 건물 속

 

소리를 잡아먹는 악어들이 득실거린다

 

 

 

 

# 전장석 시인은 2011년 <시에>로 등단했다. 2019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을 수혜했다. 한국경제신문사에 재직 중이다. <서울, 딜쿠샤>가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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