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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웨이웨이 전시회 - 인간 미래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생기면서 전시회 나들이가 훨씬 수월해졌다. 동물원 가는 길 구석탱이에 숨어 있는 과천까지 가지 않고도 좋은 전시를 볼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복된 날들인가. 전대미문의 전염병이 창궐하는 코로나 팬데믹에도 불구하고 현대미술관에서 좋은 전시가 열리고 있다. 중국의 건축가이자 설치미술가인 아이웨이웨이 전시다. 아이웨이웨이는 중국어로 艾未未(애미미)로 표기를 한다. 본명인지 예명인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이름에는 "아직 결실을 맺지 않았다"는 의미심장한 뜻을 품고 있다. 이것은 내 해석이니 틀릴 수도 있다. 어쨌든 그의 전시회 제목이 인 것과 연관 시키니 그럴 듯한 해석이라 생각한다. "모든 것은 예술이다. 그리고 모든 것은 정치다. 그리고 예술은 반드시 승리한다." 아이웨이웨이가 늘 내세우는..

여덟 通 2022.01.20

눈, 이라는 세상 - 이윤설

눈, 이라는 세상 - 이윤설 누가 지금 내 생각을 하는가 눈은 퍼붓고 쌓이고 나는 얼굴을 바꾸지 못한 지 오래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은 지 오래 베개가 내 얼굴을 반쯤 파묻어버리도록 나는 사랑하지도 않는 당신이 내 생각을 하는 걸 생각하면 잠이 오지 않은 지 오래 침대는 네 다리로 서 있거나 버티고 있거나 내 생각을 하지 않은 지 오래 내가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들의 숫자만큼 눈이 내리고 고드름처럼 얼어붙어가는 나의 침대는 삐걱이고 다시는 당신을 생각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하는 말들이 쏟아지고 퍼붓고 아우성치고 내가 당신을 생각하는 동안 나는 당신이 되어왔다는 걸 모르지 않은 지 오래 우리는 한밤중에 깨어나 당황하며 모르는 척 눈을 감은 체 발을 숨기고 속눈썹을 떤다 누가 지금 당신 생각을 하는가 우리는..

한줄 詩 2022.01.20

홀로 하루를 먹는다 - 오광석

홀로 하루를 먹는다 - 오광석 아침에 일어나면 꺼내 먹는 바나나우유맛 밤마다 끓여 먹는 라면맛 홀로 창문에 매달리는 세상과 격리된 수감자 격리를 이겨내는 건 상자 모양 원룸에서 창밖을 바라보는 일 무수한 광고지만 불려 다니는 한산한 당산동 거리 입과 코가 없는 사람들이 서로에게서 도망친다 바이러스가 엉겨 붙을라 흩어지는 사람들 어제가 복사되어 붙여진 오늘 특별한 것을 찾는데 손님 끊긴 문 앞에 앉은 식당 아저씨 올려다보며 짓는 눈웃음 마스크 속 가려진 속상함이 보인다 어둠이 밀려오는 저녁 무렵 하늘에 노란 눈 하나 떠 있다 다크서클처럼 깔린 노을 구름 눈썹이 무겁게 가라앉는다 *시집/ 이상한 나라의 샐러리/ 걷는사람 새들의 출근 - 오광석 이른 새벽 당산역 건널목 부지런히 일터로 향하는 비둘기는 볼록한 ..

한줄 詩 2022.01.20

시(詩) - 우대식

시(詩) - 우대식 음악 아닌 것으로 음악 하기 나인 것을 나 아닌 척하기 가을날 듣는 만가(輓歌) 겨울날 곁불을 옆에 두고 옹송거리며 마시는 낮술 사람은 거리를 두고 그림자 사랑하기 집 떠난 모든 이들의 이름을 불러보기 그리워하다가 다시는 생각하지 않기 집 떠난 모든 이들의 이름을 다시 불러보기 악다구니로 떼쓰며 울다가 아무 보는 이 없을 때는 슬그머니 일어나 옷 털기 꾀죄죄한 민낯으로 설산(雪山)에 대적하기 눈이 멀어도 먼 것을 모르고 형형색색 달콤하게 이야기하기 신을 실컷 조롱하다가 그 발아래 한없이 통곡하기 영원한 것이 있나요 이런 물음으로 모든 것을 탕진한 나그네처럼 우물가에 오래 앉아 있기 아주 오래도록 허공을 응시하다가 저 푸른 한 점으로 쑥 들어가기 *시집/ 베두인의 물방울/ 여우난골 시(..

한줄 詩 2022.01.18

해당화 피는 마을 - 김용태

해당화 피는 마을 - 김용태 그저 술 좀 과하게 마신 기억밖에는 파도에 휩쓸려 솟구치다 떨어지기를 수차례 목이 타서 깨어보니 웬 낯선 방에 저 여자하고 내가 벗어 놓은 신발짝처럼 나란히 누워있더라고 짚이는 게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꿈속 일 같기도 하고 차려 내온 아침상을 사이에 두고 저나 내나 내세울 것은커녕 그 뿌리조차도 알 수가 없어 감추고 싶은 지난 일들만 들추고 있었는데 힐끔힐끔 훔쳐보는 것이 아주 싫지 않는 눈치더라고 그 날 바로 '해당화' 간판부터 내리게 하고 장화 두 벌 장만하여 물이 들면 바다로 가고 물이 나면 뻘에 나가 사십 년을 버텼지 등기만 내 앞으로 안 해 놨다 뿐이지 그 때는 서해바다 전부가 내 것이었어 사랑? 아무리 근본 없는 갯것들이라고 저리 붉은 시절이 없었으려고 주렁주렁 대..

한줄 詩 2022.01.18

서쪽의 나이 - 김기리

서쪽의 나이 - 김기리 서쪽의 나이에서는 가랑잎 소리가 난다. 손으로 꼽아 보면 손끝이 시려 오는 저녁이 있다. 짚가리 냄새가 나고 검불 연기를 좋아하는 나이 서쪽의 나이에는 시린 등이 있다. 돌아앉아 있는 외면하는 방향이 있다. 서쪽의 나이를 서성이다 보면 발등이 시려 오고 환했던 겨울마다 흰 서리가 내린다. 은일자라 불리는 국화가 제철이다. 봄꽃은 놀이를 가야 제 맛이지만 방문만 열면 볼 수 있는 국화는 서쪽 나이에 이르러 가꾸기 가장 좋은 꽃 동쪽의 나이들이 찾아들고 북쪽 나이로 두서너 걸음 들어섰음에도 남쪽 나이 이끌고 동쪽이나 서쪽의 나이로 살고 싶은 것이다 고독의 문패를 내다 거는 북쪽 나이 폐일언(蔽一言)하고 동서남북 네 갈래 나이를 한데 버무려 시루에 담아 푹 쪄서 절구통에 부어 놓고 떡메..

한줄 詩 2022.01.17

꽃이라는 기호의 모습 - 강재남

꽃이라는 기호의 모습 - 강재남 우는 법을 잘못 배웠구나 바람은 딴 곳에 마음을 두어 근심이고 환절기는 한꺼번에 와서 낯설었다 오후를 지나는 구름이 낡은 꽃등에 앉는다 매일 같은 말을 하는 그는 옹색한 시간을 허비하기 위해서다 눈시울 붉히는 꽃은 비극을 좀 아는 눈치다 비통한 주름이 미간에 잡힌다 구름의 걸음을 가늠하는 것만큼 알 수 없는 꽃의 속내 연한 심장을 가진 꽃은 병들기 좋은 체질을 가졌다 그러므로 생의 어느 간절함에서 얼굴 하나 버리면 다음 생에도 붉을 것이다 얼굴이 수시로 바뀌는 계절에는 풍경이 먼저 쏟아졌다 헐거운 얼굴이 간단없이 헐린다 낭만을 허비한 구름은 말귀가 어둡다 색을 다한 그가 급하게 손을 내민다 구름이 무덤으로 눕기 전에 꽃은 더 간절해져야 하므로 울기에 적당한 시간이다 친절한..

한줄 詩 2022.01.17

우주를 만지다 - 홍성식

우주를 만지다 - 홍성식 자정 넘긴 지하 술집 스물둘 생일을 맞았다는 여급의 조그만 젖꼭지를 만지작거린다 태초의 혼돈이 이처럼 말랑말랑할까 닳은 지문 아래 깨어나는 옛날 검지와 엄지가 우주를 기억해냈다 알려주지 않은 것을 알아버린 죄 젖꼭지 혹은, 우주 앞에 허물어지고 멀리 있는 것들만 취기 없이도 행복하다 말캉거리며 피어나는 꽃들 꽃판에 그려진 적두색 유채화가 해독불가 우주의 비밀스러움과 닮았다 소유할 수 없는 이름 탓에 떠돈 생 기억되는 사건은 왜 남루할 뿐인지 다시 젖꼭지를 비틀며 우주를 만진다 되돌릴 수 있다면 돌이킬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지도 없이 오래도록 멀리 떠돌았다 젖꼭지가 흐느낀다 우주가 운다 만질수록 비밀스러워지는 것들이 흐느껴 운다. *시집/ 출생의 비밀/ 도서출판 b 저 좁은 ..

한줄 詩 2022.01.16

엄마의 술집, 그 집의 술국 - 우혁

엄마의 술집, 그 집의 술국 - 우혁 엄마는 아무것도 몰랐다 밤이 깊고 입김이 거셀수록 겨울은 엄마 집에만 머무는 거 같았다 술 없이 밤을 견딜 수 없는 족속들 오로지 시키는 건 술국뿐 가끔 식은 밥을 말아대며 씩씩대는 김 씨는 국물을 삼킬 때만 사람이 됐다 식은 국물을 몇 번이고 다시 데우고 그때마다 내장이며 순대며 은근슬쩍 더 들어가는 덤덤한 덤은 엄마도 모르고 김 씨도 몰랐다 그러니 나도 모르고 꾸벅 조는 겨울이 더 슴슴한 맛을 내는 거였다 하나 아니면 둘 빨리 비우지도 못하는 잔이 자꾸 밤그림자를 게워내는 것 같았다 어느 유적지에서 오래 유물이 되고 싶었던 입맛이 몇 번 사람이 되곤 하는 밤이었다 *시집/ 오늘은 밤이 온다/ 삶창 불온한 몸 - 우혁 파도에서 네가 걸어 나왔다 몇 번의 화장(火葬)..

한줄 詩 2022.01.16

꿈꾸는 구둣방 - 아지오

옷은 조금 크거나 작아도 입을 수 있으나 신발은 곤란하다. 조금 작다 싶으면 발가락이 아프고 헐렁하면 양말이 벗겨지거나 뒷굼치에 물집이 생기기도 한다. 자기 발에 맞는 신발이 중요한 이유다. 이 책은 구두를 만드는 사람들 이야기다. 특정 저자를 내세우지 않고 구두 브랜드인 아지오로 정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 구둣방의 탄생 과정과 지향하는 바를 감동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읽기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책이라고 할까. 두 인물을 주죽으로 끌고 간다. 구둣방 대표인 유석영과 구두 장인 안승문이다. 구두점으로 성공해 돈을 번 소상공인의 성공담이었다면 나는 관심을 두지 않았을 것이다. 나도 돈을 밝히는 사람이지만 재테크나 성공담에 관심이 없다. 이 구둣방의 정식 사명은 이고 아지오(AGIO)는 수제화 상표다. ..

네줄 冊 2022.0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