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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있는 지하실 - 강신애

바다가 있는 지하실 - 강신애 그 바다는 흐르지 않아, 회벽을 붙들고 나지막이 철썩일 뿐 퀴퀴한 동굴 속에 바다라니! 처음엔 수건인 줄 알았지 만지면 손에 푸른곰팡이가 묻어나는 바다는 어둠과 거미줄, 망가진 집기들과 먼지에 찌든 지하실의 햇빛 목마름이 만들어낸 몽상일까 바다를 고정하고 있는 수평선에서 지난여름 백사장 가설무대 색색의 리본을 뭉게뭉게 뽑아내던 마술사의 끝없는 입이 떠올랐지 아니, 바다가 토해낸 거품 속 리본이 마술사의 혀를 끌고 나왔던가 무언가를 정밀히 반추하기엔 진한 하수구 냄새의 지하실 이곳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바다를 나는 네 귀퉁이 접어 가방에 집어넣고픈 충동을 가까스로 억누른다 지퍼를 열면 왈칵, 쏟아지는 이 신성한 허무를 어떻게 걸어놓을까 수평선이 허물어져 내 방의 너무 많은 ..

한줄 詩 2018.02.23

웃음인지 울음인지 - 박용하

웃음인지 울음인지 - 박용하 태어난 날은 알지만 죽을 날은 언제인지 모르는 알고 보면 누구나 시한부 인생 알 것도 없이 죽을 병이 삶인데 막상 삶이 1년이나 6개월짜리 꼬리표 달면 미운 털 몇이고 다음 세상 식탁에서도 생선가시 발려내며 밥 먹고 싶은 인간 몇일까 나나 내 선배나 내 후배들 만든 몸들 하나 둘 세상 뜨고 상갓집에서 별다른 느낌도 없이 술 먹는다 직장암 수술 받기 위해 어머니 입원한 원자력 병원 엘리베이터에 나보다 한창 새파란 이마 뒤로 머리카락 하나 없는 절대 소녀, 빛이라도 마주 튈라 그저 눈 허공에 깔다 콩나물국밥집에서 특별한 느낌도 없이 아침 먹는다 *시집, 견자, 열림원 성욕 - 박용하 1 수줍음과 난폭함이 늘 양날의 칼처럼 맞대고 있다 평생 동안 시도 때도 없이 출몰하며 귀하다고도..

한줄 詩 2018.02.23

곧, 사과 - 서규정

곧, 사과 - 서규정 벌겋게 눈을 떠라, 무덤 속에 들어가면 잠은 실컷 잘 수 있나니 살아 있는 동안 닦고 조이고 기름 쳐라 우리 동네 입구 도서관에 말씀 한 자락이 그럴듯하게 깔렸다 또 그것인가, 공개경쟁, 민족사적 수난과 드난살이를 하던 때를 까맣게 잊고 집단무의식이 끌고 가는 경제만능의, 요지경 속에 뒤처진 빈민들은 어쩌라고 그래 미래는 아무래도 암울해야 미래겠지 이리저리 둘러보아도 갈 곳이 별로 없다면, 별천지를 찾아 가야지 야구장에 들면 열 개 구단의 깃발따라 바람도 따로따로 불어 바람의 바운드를 맞추려다 공을 놓친 수비수들이 겹쳐 나뒹굴며 누워서 걷는 하늘, 영웅도 전설도 보이지 않는 이 시대에 그대들이 영웅들이다 두근두근 혼자 걷는 내 가슴속에 낙원은 운동장보다 별반 크질 않아 곧, 사과 도..

한줄 詩 2018.02.22

무화과나무 - 배홍배

무화과나무 - 배홍배 꽃 피워본 적 없는 나무에 일몰 걸릴 때 마른 가지에도 별자리끼리 얽히는, 잎보다 많은 아버지의 밤들은 피어났다 별자리에 숨겨진 운명을 읽어내느라 얼굴 밖까지 흘러내리는 눈, 아버지의 눈물과 마주쳤을 때 모르는 척, 입술부터 붉었다 손바닥 위로 발돋움을 하고 나뭇잎을 닮아가는 손금대로 운명을 기다리는 꿈속 한 자리 고개 저으며 아버지가 올려다보던 높이에서 걸음마 배우고 모르는 척, 입술부터 붉었다 *시집, 바람의 색깔, 시산맥사 고목 - 배홍배 남평역에 저녁이 옵니다 늙은 벚나무에 뚫린 커다란 구멍으로 오래된 저녁은 천천히 옵니다 그 옛날 리어카에 실려나간 사람이 나무 아래서 몸속으로 흘려보냈을 숨 가쁜 하늘도 저 구멍을 지나왔을까요 숨 끝에 밀린 목구멍은 빈 소주병 안에 아직 고여..

한줄 詩 2018.0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