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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 밑 - 허림

마루 밑 - 허림 마루 밑, 누렁이가 새끼 낳으러 들어가기도 하고 쥐약 먹은 누렁이 거품 물고 뻘건 눈 부라리며 서서히 죽어가던 마루 밑, 햇살이 닿지 않아 더 어둡고 서늘하고 왼손잡이 할아버지 꾸불꾸불한 지팡이와 고집 센 검정 소 목덜미에 얹었던 멍에 삐딱하게 떠받고 있는 마루 밑, 허물 같은 생의 거처는 남아있는가 뭉툭한 호미 날이나 부러지고 이 빠진 낫 모질뱅이 숟가락 깨진 대접 볼펜에 끼워 쓰던 몽당연필 눈알 같은 유리구슬 국어 책 겉장으로 접은 딱지 몸통뿐인 기타 무궁화 꽃이 선명한 1원짜리 하얀 동전 어머니한테 대들다가 떨어진 것 같은 단추 빠져 들어간 마루 밑, 먹구렁이 울음 웅숭깊은 어떤 기억 *시집, 노을강에서 재즈를 듣다, 황금알 굴뚝 - 허림 마른 연기 피어오르는 굴뚝 보면 왠지 그 ..

한줄 詩 2018.02.17

눈물이 절며 길 떠날 때 - 김이하

눈물이 절며 길 떠날 때 - 김이하 멀어지는구나 아주 오래 전 떠나온 길을 기억으로 더듬어 돌아가는 길 발을 절며 먼 데 보니 느티나무 한 그루 의지가 되네 인생은 두 발로 안 되면 지팡이를 짚고 그도 안 되면 네 발로 그도 안 되면 죽음으로 무슨 말인가를 지껄이다 가는 것 멀어지는구나, 풍경들 옹알이하던 아이가 등에서 내려와 해시계의 그림자처럼 일생을 돌고 어둠에 묻힌 그 하루 자꾸 늦어지는 벽시계에 새 전지를 끼우고 멀어지는 것들의 속도를 재고 있었다 한 방울 남은 눈물이 절며 길 떠날 때 *시집, 눈물에 금이 갔다, 도서출판 도화 눈물에 금이 갔다 - 김이하 남의 집 한 칸을 빌어 십수 년을 살면서 이게 어디냐고 가끔은 걸레질 비질도 했는데 이제는 더러움에 익숙했는지 그게 다 내 살 같다 빠릿빠릿하..

한줄 詩 2018.02.17

신천(新川) - 안상학

신천(新川) - 안상학 어둡구나 어둠의 시절과 더불어 썩어 흐르는 신천 우리들의 캄캄한 그리움은 어디로 흐르는 것이냐 강변 언덕배기 포장마차에서 지친 노동의 하루를 달래고 기름때 낀 손을 조아려 담배불을 나누면 우리들의 그리움은 흘러 무엇을 이룬다냐 쓸쓸히 헤어져 돌아와 누운 산동네 하꼬방에 번지는 쥐오줌 애인이 흘리고 간 사랑의 흔적처럼 벽에 거꾸로 매어달린 채 야위어가는 무수한 안개꽃 같은 슬픔의 파편들이 젖은 눈길에 박혀든다, 우리들의 여가는 밥과 잠을 위한 시간일 뿐 밤낮 없이 형광등 불빛 아래 부나비처럼 모여 일만 하는 벌레무리 살아흐른다는 것은 이렇게 서럽기만 한 것이다냐 썩은 물만 흐르는 신천 저 깊은 어둠의 중심을 향하여 슬픔의 젖은 파편들을 뽑아 던진다 파편들은 단단한 돌멩이로 날아가 신..

한줄 詩 2018.02.17

난 좌파가 아니다 - 신현수

난 좌파가 아니다 - 신현수 비 내리는 날 낡은 유모차에 젖은 종이박스 두어 장 싣고 가는 노파를 봐도 이제 더 이상 가슴 아프지 않으므로 난 좌파가 아니다 네온 불 휘황한 신촌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 위 온몸을 고무로 감고 사람의 숲을 뚫고 천천히 헤엄쳐가는 장애인을 봐도 이제 더 이상 가슴 저리지 않으므로 난 좌파가 아니다 천일 가까이 한뎃잠을 자며 농성을 벌이고 있는 노동자들을 봐도 이제 그 이유조차 궁금하지 않으므로 난 좌파가 아니다 제초제를 마시고 죽은 농민을 봐도 몸에 불 질러 죽은 농민을 봐도 아무런 마음의 동요가 없으므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지 않으므로 난 좌파가 아니다 난 좌파가 아니다 *시집, 시간은 사랑이 지나가게 만든다더니, 도서출판 이즘 희미한 옛 세월의 그림자. 4 - 신현수 자기가..

한줄 詩 2018.02.16

흔들리는 풍경 - 장만호

흔들리는 풍경 - 장만호 늦은 밤, 숨죽인 화계사를 건너다 보면 국립재활원의 아이들 서서히 일어나 하나, 둘 셋 손을 잡는다 휠체어를 타거나 지체 부자유한 별들 별들을 이어 별자리를 긋듯 밀거나 당겨주며 수유리의 밤을 온몸의 운동으로 순례한다. 길 밖에 고인 어둠만을 골라 딛으면서 몸이 곧 상처가 되는 삶들을 감행하며 흔들리는 평생(平生)을, 과장도 엄살도 없이 흔들며 간다 그 모습 가축들처럼 쓸쓸해 왜 연약한 짐승들만 겨울잠을 자지 않는지 작은곰자리에서 내려올 눈발을 헤치며, 왜 사람만이 겨울에 크는지, 묻고 싶었지만 아이들은 여전히 붕어빵을 입에 물고는 풍경(風磬)처럼 흔들리며 간다 깨어 있으려고 흔들려 깨어 있으려고 *시집, 무서운 속도, 랜덤하우스 수유리(水踰里)에서 - 장만호 함부로 살았다 탕진..

한줄 詩 2018.0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