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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의 봄 - 김기섭

북한산의 봄 - 김기섭 미처 슬퍼할 새 없이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하지만 내가 사는 변방에는 아직도 눈이 내린다. 경계도 없이 내리는 눈 범람하는 바람 속으로 내 영혼의 머리칼 사이로 봄눈이 날리는 동안 마른 풀잎만 나풀거렸고 생각할 틈도 주지 않고 떠난 여자처럼 먼 산으로 날아간 새는 돌아올 것 같지 않았다. 마른기침을 쿨럭이며 객지에서 봄을 기다린다. 꽃이 피고 진들 무슨 상관있을까마는 노새를 타고 아득한 시공을 건너오는 이의 목소리 봄은 꿈꾸는 강을 건너 집시들의 언덕을 지나 더딘 몸짓으로 산기슭을 오르는데 보았는가 그대 창가에 핀 목련 세상의 모든 것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시점에서 내 몸에서도 여린 이파리들이 사사로이 돋아나고 밤새 시리도록 별들이 뜨더니 각혈하듯 산벚꽃이 핀다. 미열이 도져 아..

한줄 詩 2022.04.10

인왕산, 사직단-기차바위-홍제동

예전에 한 달에 한 번은 갔던 산인데 요즘 인왕산 오르는 게 뜸했다. 이제부터 먼 데 보지 말고 자주 오르리라. 오늘은 사직단에서 시작했다. 하긴 예전부터 십중팔구 나의 인왕산 출발은 이곳에서다. 갈 때마다 내가 쉬는 자리에 진달래가 피었다. 날씨가 좋아 풍광은 눈이 부실 정도다. 인왕산은 죽을둥 살둥 산을 탈 필요가 없다. 마실 나온 기분으로 가다서다 풍경을 감상했다. 인왕산 정상에 서자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이런 날씨 복 받은 날이다. 기차바위로 가는 갈림길에서 돌아 보니 인왕산 정상이 보인다. 봄이면 피는 진달래를 어찌할 것인가. 산에서 만나는 진달래는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다. 기차 바위 부근 그늘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30분은 족히 머물렀다. 주변 풍광을 감상하며 한동안 앉아 있..

일곱 步 2022.04.10

인왕산 자락길 + 안산의 봄

서울에서 봄맞이 할 곳이 어디 인왕산뿐이랴만, 오랜 기간 동네 뒷산 오르듯 올랐던 산이 인왕산과 안산이다. 화창한 토요일 김밥 한 줄과 시루떡 한 팩, 생수 한 병 달랑 들고 인왕산 자락길을 걸었다. 중턱에서 바라본 인왕산 정상이다. 오늘은 정상보다 봄이 있는 곳을 찾아 자락길 위주다. 정상은 뒤로 미루고 국사당 가는 길로 들어선다. 해골바위 근처에서 봄을 만끽하며 오래 머물렀다. 개나리가 한창이다. 풍광을 실큰 감상하고 국사당 쪽으로 내려간다. 인왕사의 상징인 선바위는 언제 봐도 신비롭다. 국사당과 인왕사 주변이 봄꽃으로 황홀하다. 인왕산을 오를 때 이곳이 출발점인 날도 있다. 안산을 가기 위해 무악재 하늘다리 쪽으로 걷는다. 인왕정까지 가는 길이 온통 꽃으로 뒤덮혔다. 무악 하늘다리에서 본 인왕산이다..

일곱 步 2022.04.09

불길한 광선과 기이한 날갯짓 - 우혁

불길한 광선과 기이한 날갯짓 - 우혁 손톱 밑이 더럽다고 느꼈을 땐 계절 하나가 사라지고 있었다 건너가기에는 너무 먼 걸음이 검은 물 가득 고인 채 흐려졌다 나는 괴물이 필요해 너의 거친 숨소리처럼 술자리 끝의 악다구니처럼 밋밋하지만 살짝 쓰리고 한없이 가볍기만 한 악력(握力) 너는 자세보다 먼지를 사랑해서 끝이 아닌 것들의 이름을 꼽느라 하루가 갔어 빛나던 것들이면 모두 이름이 있었지 그해에는 마모가 심했다 노인들이 기침은 모래 가루처럼 바닥에 떨어졌고 새들은 그것들을 쪼아대며 길 위에 몸을 긁어댔다 어둠은 증명되는 거야 어둠이 어둠임이 증명되어야 비로소 그림자인 거지 너는 새의 발자국을 따라갔고 자주 넘어졌다 그게 그해의 마지막 날갯짓이었다 *시집/ 오늘은 밤이 온다/ 삶창 저녁의 일부 - 우혁 대부..

한줄 詩 2022.04.09

팔굽혀펴기 - 박숙경

팔굽혀펴기 - 박숙경 지루한 생각이 자라나면 미완의 팔굽혀펴기를 꺼내야지 눈물이 고여 넘치기 전에 비밀이 될 수 있는 것과 비밀이 될 수 없는 것의 차이는 뻔한 것과 뻔하지 못한 것의 차이 만월을 삼켜버린 꿈 아름다운 슬픔일까 꿈 깨기 전의 깊은 흐느낌 같은 걸까 얼마의 기억들이 줄을 서서 못을 박고 입장을 바꿔보지 못한 생각들이 집을 짓는 시간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생각으로 초라해진 생각의 어깨를 두드리며 문턱을 넘나드는 여러 말을 생각했다 살아야 하는 세상에서는 살아야 하는 것이 순서이므로 이별이라는 말을 포기하기로 했다 언젠가는 완성될 팔굽혀펴기를 위하여 *시집/ 그 세계의 말은 다정하기도 해서/ 문학의전당 추풍령 - 박숙경 솔직히 말하자면 트로트보단 발라드였다 처음엔 지명에 이끌렸고 가을비 촉촉한 ..

한줄 詩 2022.04.09

이렇게 쓰려다가 - 김태완

이렇게 쓰려다가 - 김태완 짧게 쓰기로 했다 구색을 맞추려 길게 늘어뜨린 행사장 축사 같은 들리지 않는 귀를 자꾸 만져보고 잘 붙어 있는지 확인하는 자세가 하품을 하거나 초점 없는 눈으로 언제 박수를 칠까 무념의 시간을 허비하는 것보다 조금은 위안이 될 수도 있었다 메이커 없는 신발을 싼 맛에 사서 분명 몇 달 버티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실속으로 치자면 싼 맛이 최고다 걸음이 느려지거나 보폭이 짧아지지는 않았다 넋두리, 밑줄 치며 한 행 한 연을 곱씹어 읽어보아도 너무 깊은 그 속을 읽어낼 수 없어 한참을 자책하면서 읽던 수준 높은 넋두리 지방의 무지렁이로 사는 나는 짧은 것들만 과일 고르듯 골라 마음에 길을 터주기로 했다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정신없이 갈갈이 찢어지고 쪼개진 몇 분 몇 초가 아쉬운 일터..

한줄 詩 2022.04.09

담장 밖이 궁금한 봄꽃

경복궁 담장은 걷기에 참 좋은 길이다. 너무나 화창한 봄날 벚꽃이 만개했다. 요즘 우리 궁궐에서 벚꽃은 보기 힘들다. 경복궁뿐 아니라 덕수궁, 창덕궁 등에서도 마찬가지다. 예전에 봄이면 창경궁 벚꽃놀이가 아이들의 자랑이었다고 한다. 일본 색을 지운다는 이유로 궁궐에 있는 벚꽃이 사라졌다. 봄꽃의 대표인데도 벚꽃이 일본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이것도 일종의 콤플렉스일 수 있다. 꽃은 꽃이다. 그럼 입법부의 상징인 여의도 국회 벚꽃은 어떻게 볼 것인가. 아무리 봄꽃이 만발해도 벚꽃을 뺀다면 봄꽃은 허전하다. 어쨌든 봄이면 나는 벚꽃으로 위로를 받는다. 예전 사람들도 그랬을 것이다. 고단한 서울살이 노동에서 벗어나 아이들과 하루쯤 김밥 싸들고 창경원으로 나들이 간 가족 풍경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거기다 사진 한..

다섯 景 2022.04.07

늙은 혁명가의 농담 - 정덕재

늙은 혁명가의 농담 - 정덕재 2021년에 혁명가로 살기 위해서는 전동드릴 쯤은 자유자재로 다뤄야 한다 수많은 볼트와 나사로 고정된 것을 풀기 위해 혁명가는 숙련된 기술자여야 한다 이념과 열정으로 무장하기에 앞서 최신 장비로 무장해야 한다 콘크리트 벽에 못을 박다가 드릴의 무게 감당하지 못해 손목이 꺾였고 정형외과를 다닌 지 2주째 장기적인 치료를 위해 한의원에 다녀야 할지 거리의 간판을 살피는 나이 든 혁명가는 아무도 모르게 목공방에 다니기 시작했다 지금도 혁명이 필요하냐는 질문에 전동드릴을 자유롭게 다룰 때쯤 해답을 말한다고 했다 나이가 들면 손목과 발목과 이음새의 안부를 먼저 챙기는 게 혁명의 길에 나서는 첫 번째 태도다 *시집/ 치약을 마중 나온 칫솔/ 걷는사람 여론조사 2 - 정덕재 -벚꽃과 살..

한줄 詩 2022.04.07

재활용의 봄 - 이서화

재활용의 봄 - 이서화 장례식장에서 들려 나온 조화(弔花)가 다시 장례식장으로 실려 가고 목련도 해마다 조문을 다녀오는지 올해는 전년보다 꽃송이가 더 줄었다 3월 어디쯤에서 시들거나 빈자리를 골똘하게 골랐을 목련 꽃송이들 시든 꽃들을 뽑아내고 싱싱한 꽃들로 바꿔친, 어느 장례식장 목련실로 실려 갈 저 환한 봄 한 나무 아래에서 여러 번의 봄과 마주치듯 봄은 다만 꽃송이를 바꾸는 철인 것일까 뭐 어때, 한 그루 목련나무 아래서 몇 번의 고백을 바꿔치기하던 친구처럼 다시 봄을 끌고 온 목련 바꾸지 않으면 연애라는 말도 없다 장소와 풍경이 봄마다 연애하는 사이 장례식 꽃이 아름다워지는 시기가 되었다 나이 든다는 것은 마당 가의 꽃나무들 때문이다 두근거리는 봄은 늘 혼자가 아니고 숨어서 지켜보는 이별 때문이다 ..

한줄 詩 2022.04.07

별을 바라보는 날이 많아졌다 - 박두규

별을 바라보는 날이 많아졌다 - 박두규 밤이면 별을 올려다보는 날이 많아졌다. 세상의 크고 작은 슬픔들이 올라가 자리 잡은 것들 내 오랜 슬픔은 어디쯤에서 빛나고 있을까. 북두칠성은 산 아래 숨어 기척도 없는데 은빛 윤슬 반짝이는 강가로 바람이 일고 나는 홀로 그대를 탐문하며 별빛 사이를 흐른다. 어둠 너머 고요 속 그대를 좇아가노라면 분노의 세상, 탐욕의 세월도 잊고 지독한 내 어리석음의 늪을 벗어날 수 있을까. 깊은 밤 텅 빈 시간 속 별을 바라보는 그대와의 하얀 밤이 있어 허튼 약속 하나 없이 강을 건널 수 있으리. 안개 피어오르는 강가를 걸으며 이승의 세월 켜켜이 쌓인 오래된 부고(訃告)를 모두 강물에 띄워 보냈다. 더는 잃을 것도 얻을 것도 없다는 듯 강물은 두텁나무숲을 휘돌아 흐르고 *시집/ ..

한줄 詩 2022.0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