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통점을 잃어버린 나는 더 이상 낙화가 아프지 않다 - 강시현

마루안 2022. 3. 24. 22:48

 

 

통점을 잃어버린 나는 더 이상 낙화가 아프지 않다 - 강시현

 

 

붉은 실루엣을 걸친 이별은 슬픔의 몫

아득한 헤어짐을 위하여

이별에게

슬픔의 보따리를 안겨 떠나보내지 않기 위하여,

이제는 하관처럼 분명한 사건

통점을 잃어버린 나는 더 이상 낙화가 아프지 않다

 

한 생애의 품격을 정하는 것은 쓸쓸함의 강도에 있겠으나

먹고사는 것 자체가 예술이라던

장사치의 푸념이 더 미더운 시간

 

복수초를 달여 장복하면 말기암도 낫는다는 헛도는 소문과

흑단 같은 용 문신으로도 가려지지 않던 나약한 흉터,

상상을 믿어야만 신의 얼굴이 보인다던 종교의 힘

무엇이라도 잡고 싶었던 절박한 손

 

초정밀 과학으로 몸단장을 하고

초자연적 미신으로 머리단장을 하고 늘어선

인텔리전트빌딩의 거리에서 흔들리던 현생의 가벼움

생명 부지의 판단은 목구멍의 몫,

기록의 단추를 채우고

경건함의 각도로 고개를 떨구고

조금씩 굽어 가는 삶의 정조,

우연히 마주쳤다가 화들짝 놀라 삶은 홍합처럼 벌어지던 환각쟁이 입술

내 삶은 당신이 버리고 떠났다

 

최대치의 슬픔을 뽑아내는 새벽의 비린내에 목이 메고

슬픔은 조작된 이별의 장치였음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세월은 눈치가 없고

시간은 쉴 틈이 없고

아무 상처도 없었던 듯

살아 본 기억도 없이 또 하루를 끌고 간다

 

 

*시집/ 대서 즈음/ 천년의시작

 

 

 

 

 

 

고양이 꼬리부터 오던 - 강시현

 

 

나의 숭배는 아라비아의 천 개 계단보다 높고 가팔랐죠

따스하고 살가운 날이 올 거라는 소문의 수액을 빨아올리며

밤낮으로 숨이 가빴죠

 

쓸쓸함은 이방인의 종교처럼 남았죠

봄이 가까웠다는 기별은 멀기만 했죠

정전된 꽃밭 같았죠

 

기다리는 일은 대부분 무거운 허사였으나

새벽 언덕을 넘어 고양이 꼬리부터 오던 봄이 있었죠

짧은 봄날은 허리를 곧추세우고 지상의 변두리를 비추었죠

순식간에 미지의 무대를 적시며

도망간 여자가 벗어 놓은 속옷처럼

한 생애의 빈방마다 흘러들었죠

 

 

 

 

# 강시현 시인은 경북 선산 출생으로 경북대 정외과를 졸업했다. 2015년 계간 <리토피아>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태양의 외눈>, <대서 즈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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