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벤치와 구상나무가 있는 공원 - 류흔

마루안 2022. 3. 29. 21:40

 

 

벤치와 구상나무가 있는 공원 - 류흔

 

 

애인이 버리고 간 여자의 어깨가 흔들렸다

잔가지에 별이 열리는 밤

 

대규모의 슬픔이 군단(群團)처럼 걸어오는 밤이다

벤치는 여자의 엉덩이를 만지며

감싸 쥔 손가락 사이로 주룩 흘러내린 울음을 핥는다

잘 가라 나쁜 놈

그쯤 욕은 해야겠지 이해한다 여자여

 

스산한 야밤에 홀로 우는 너는 누구냐?

을씨년이야

벤치는 스스로 묻고 대답하는 원맨쇼의 달인이다

 

엊그젠 인부들이 다 큰 나무를 데려왔지

무언가를 꾸미거나 모색하는

매우 기획적인 성향의 구상나무

때론 곧이곧대로 풍경을 일러주는 구상나무

구름다리 건너 동편 호수 옆에 발목을 묻은 밤의 우두커니

낮에는 피라미드 형신에 푸른 관상이었던

이제는 검은 실루엣이 돼버린 비구상

 

비현실 같던 이별이 현실임을 깨달을 때

여자는 비구상으로 일그러졌다

 

여자의 어깨는 아직 흔들리고

공원에 드문드문 서있던 백목련들이

벤치 쪽으로

자꾸만 티슈를 던져주는 밤이었다

 

 

*시집/ 지금은 애인들을 발표할 때/ 달아실

 

 

 

 

 

 

실연의 추억 - 류흔

 

 

태양은 바다의 끄나풀,

하루의 정탐을 마치고 숨어든다

처음에 주저했으나 나중에는 신속했다

헤어지며 끝내 돌아보지 않는 여자가 생각났다

 

비 내리자 민첩하게 펼치는 우산

납자의 왼 어깨가 젖어있다

환풍구 앞에서는 여자를 우회시켰는데

치마는 다른 바람을 맞으러 갔다

 

빈 해변을 빈틈없이 채우는 바람

코트 깃과 죽음을 치켜세워준다

모래에 남은 총총한 흔적들

뒤로 걸어 바다에서 나온 발자국을 보았다

 

점차 줄어든다 간명해진 머리통,

미리 들어간 태양은 보았을까?

이제는 오른 어깨마저 젖었을 것이다

희망은 희망하는 자의 것이 아닐 수 있음을

 

알았으리라, 끔찍한 공기와 웃음을

공중에 정지한 갈매기에게 던져주었을 때

냉혹한 별들은 표창처럼 번뜩였고

사랑 없이 사랑하는 얼굴이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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