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파람새 울고 동백꽃 지니 - 안태현
모처럼 홀로 되어
묵은 때 씻겠다고 뭍에서 섬으로 건너오니
휘파람새가 운다
가파른 비탈에 뒹구는
동백꽃 숭어리들
섬에서는 나를 오래 보관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싸구려 옷을 좋아하고
허술한 민박집도 마다하지 않는 그런 마음가짐이
내 생의 농도
너무 묽은 게 거슬리고
너무 끈적이는 게 두렵기는 하지만
술집에서
바다에서
점집에서
나사 한 개가 풀린 것처럼 낭비가 필요한 내 감정들
꽃 질 때 우는 새도 있는데
너무 우는 일을 잊고 살았다는 것인가
등 돌리고 가서는
밥 한 공기처럼 웃는 일이 많았다는 것인가
나를 태운 이 섬이 둥둥 떠서
망망대해로 흘러가면
홀로 우는 휘파람새가 되어도 좋겠다
파도에 밀리고 밀리어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사람이 되어
끝내 시처럼 살아내도 좋겠다
*시집/ 최근에도 나는 사람이다/ 상상인
탁발 - 안태현
-루앙프라방
꽃 피는 일만 생각하다
꽃 진 자리
흔한 한 끼도 없이 홀로 건너가야 하는 강
매어둔 배는 없고
돌아보면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나와 당신들
가령 다 보여줄 수 없는 강가의
희고 검은 날씨 같은
해를 넘길 때마다
새로 지은 밥처럼 따뜻한 영혼이란 말을 좋아했지만
뻔뻔하고 뻣뻣하고 빡빡한
씀씀이가
내 침몰의 원인
그러니까 더 엎드려보라는
붉은 가사를 입은 꽃들이 문턱을 넘어서 마당을 지나 점점 어두워지는 골목까지 배웅할 때가 있다
이게 생시인사 꿈인가 싶어서
가진 모든 것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보면
아무것도 지불할 수 없는
눈물과 열매들
내가 이것을 알고 있는 게 가장 무섭다
# 안태현 시인은 전남 함평 출생으로 2011년 <시안>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이달의 신간>, <저녁 무렵에 모자 달래기>, <최근에도 나는 사람이다>가 있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벤치와 구상나무가 있는 공원 - 류흔 (0) | 2022.03.29 |
---|---|
섣부른 저녁 - 최규환 (0) | 2022.03.26 |
고사목 1 - 박소원 (0) | 2022.03.25 |
고비사막의 별 - 오광석 (0) | 2022.03.25 |
통점을 잃어버린 나는 더 이상 낙화가 아프지 않다 - 강시현 (0) | 2022.03.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