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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한 채집 - 윤향기

쓸쓸한 채집 - 윤향기 나비를 수집하러 팔라우, 페낭, 마다가스카르에 온 적 있다 더할 나위 없이 화려한 열대로 치장한 나비들이 비린내가 날 때가 있듯이, 모든 나비들이 번개의 엽록소를 탁본하지는 않는다 날개 달린 뱀들이 떼 지어 지나는 곳에서 곧잘 목이 메는 황금색을 채록하는 것은 누군가 흘리고 갔을 눈물 하나 줍는 일이다 누군가 흘리고 갔을 이름 하나 줍는 일이다 그리하여 나비가 꽃잎을 박차고 장자의 산맥을 넘어갈 때 날개를 먹이와 바꾼 어떤 떨림은 살아서는 발굴되지 못할 이름 모를 계곡에 뒤태를 묻고 가슴을 문질러 젓대를 불던 어떤 춤사위는 살아서는 발굴되지 못할 늪지에 앞태를 묻는다 천 년 전 별이 쓸린 간이역에 누군가를 버리고 온 것 같아 이 세상에 와서도 바오밥나무 몇 잎은 가늘게 흐느꼈다 *..

한줄 詩 2022.04.06

아껴 둔 잠 - 한명희 시집

한명희, 같은 이름을 가진 시인이 여럿이다. 동명다인이다. 아마도 한국의 시인 중에서 한명희라는 이름이 가장 많지 싶다. 김철수 이영희 등 교과서에 나오는 이름을 가진 시인도 이 정도로 많지는 않다. 여성 시인이라 생각할 수 있으나 이 시집의 저자 한명희 시인은 남성이다. 시 읽는 사람보다 시 쓰는 사람이 더 많은 현실에서 같은 시인인 줄 알았다가 엉뚱한 시집을 만날 때가 있다. 넘어진 김에 쉬어 간다고 여기지만 가끔 씁쓸하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라는 유명한 문구를 패러디하자면 내게는 시집은 많고 시간은 없다가 되겠다. 그래서 늘 읽어야 할 시집 목록이 끊임없이 쌓이면서 줄어들지를 않는다. 까다롭게 고르는데도 그렇다. 내가 자주 써먹는 낭중지추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숨어 있어..

네줄 冊 2022.04.06

어느 건축물을 찾아

요즘 강서구 마곡동을 가면 요지경임을 느낀다. 1990년대만 해도 이곳은 군데군데 논이 있을 정도로 시골 풍경 물씬 났는데 격세지감을 느낀다. 마곡 지구 갔다가 멀리서 보이는 이색적인 건축물이 눈에 들어온다. 가까이 가서 보니 KOLON One & Only Tower다. 코오롱 그룹은 한국 나일론의 시초 회사다. 코오롱이란 회사 이름도 코리아+나일론(Korea+Nylon)의 합성어다. 인류 문화에 나이론은 가히 혁명이었다. 지금도 그 쓰임은 곳곳에서 약방의 감초다. 어렸을 때 나이롱 바지가 유행이었다. 값싸고 질긴 반면 불에 닿으면 금방 구멍이 나는 단점이 있다. 이 건물은 코오롱이 현대 공법을 동원해 지은 거라고 한다. 독특한 외양뿐 아니라 첨단 소재로 만들었다니 높이 살 만하지 않은가. 안에 들어가 ..

다섯 景 2022.04.05

괜찮지 않은 봄날 저녁 - 김명기

괜찮지 않은 봄날 저녁 - 김명기 봄비 오는 줄 모르고 잤다 내리는지 몰랐던 비처럼 쏟아지는 잠 누군가 몸 한 귀퉁이를 잘라냈다는 말을 듣는데 온몸이 얼마나 아프던지 비명은 내 몫이 아니었으므로 그녀는 괜찮다고 했지만 괜찮지 않았다 읽던 책을 펼쳐 놓고 노트북도 켜 둔 채 시간 모를 잠에서 깨어 뒤척이다 그녀에게서 사라졌다는 몸 한쪽으로 다시 돌아누웠다 수화기 너머 정비사가 낡은 찻값의 반이나 되는 수리비 견적을 말하며 깨끗하게 수리하면 괜찮을 거라 했지만 괜찮지 않았다 며칠째 떠돌이 개가 집 주위를 맴돌며 눈치를 살피지만 괜찮지 않은 마음으로 모르는 척 피하고 있다 비 내리는 봄은 괜찮지 않은 것투성인데 괜찮다는 말을 입 속에서 혀처럼 달고 산다 한쪽을 잘라낸 몸과 찻값의 절반이나 되는 수리비와 굶주린..

한줄 詩 2022.04.05

후회의 목록 - 김화연

후회의 목록 - 김화연 내가 작성한 후회의 목록엔 왠 노인들이 이렇게나 많을까 발 빠른 나이를 먹는 노인들과는 달리 나는 늘 뒤늦은 나이가 드는 걸까 봄볕에 머리 감겨 드리지 않는 일 정든 가구를 버리라 했던 일 뾰족한 말의 끝을 살피지 않았던 일 늙은 집과 점점 멀어졌던 일 세상엔 묵음의 날짜로 지나가는 달력도 있어 후회는 무수한 동그라미로 표시되고 어쩌다 다정했던 기념일들이 드문드문 휴일 같을 때 나보다 더 멀리 간 노인을 따라가지 않고 자꾸 기다리라고 한 말 어느새 끝 쪽에 앉아있는 노인을 향해 왜 그런 위험한 곳에 앉아 있냐고 또 역정을 냈던 말 당신이 나의 후회 목록이라는 사실을 빨리 알아차리길 바랄 뿐 하나하나 후회를 살피다보면 그 많던 후회를 모아 두었던 노인들은 후회마저도 주섬주섬 싸가지고..

한줄 詩 2022.04.05

나비 박쥐 - 김남권

나비 박쥐 - 김남권 나는 나쁜 피를 빨아 먹는 박쥐다 어둠을 밥보다 좋아하고 어둠 속 불빛의 길에서 하이에나처럼 바람의 통로를 따라 움직인다 머물 곳이 없어 평생을 거꾸로 매달려 잠자리에 들고 거꾸로 매달려 눈을 씻었다 동굴보다 깊은 어둠 속에서 오직 허공을 날아오는 하나의 주파수만 찾았다 시간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가슴속의 파동을 기억하는 그 사람의 등 뒤에 숨어서 숨소리만 들었다 솜털이 일어서는 오감을 열어놓고도 한 번도 그립다는 말을 못했다 반백 년을 넘게 비워논 하늘 아래서 한겨울에도 지지 않는 하얀 민들레꽃 한 송이로 피어나 서러운 눈물조차 삼켜야 했다 눈보라 따위는 두렵지 않았다 동면에 들기 전, 심장이 잠시 멈추는 법을 배우고 옛사랑의 그림자를 베어 하얗게 솟구치는 그 피를 마시고 어둠 속을..

한줄 詩 2022.04.05

내가 민들레를 울렸을까 - 이은심

내가 민들레를 울렸을까 - 이은심 올봄엔 노랑에 든 도둑이나 되어야겠다 손을 들어도 새 울음 따위가 그냥 지나가는 춘분의 변두리 존댓말로 입술을 핥는 아득함 속에서 내가 당신을 울렸을까 모아놓은 느낌표를 잠시의 사소함에 줘버리고 작년만큼 웃었는지 당신 없는 웃음을 접어 날렸는지 봄은 아무에게나 오지만 아무나 아픈 봄은 아닌 걸 세상이 쪼그려 앉아야 잘 보일 때 봄은 옳았고 앉은키로 다가가는 당신에겐 다 커버린 상처를 지지하는 혼자만의 처세술이 옳았다 장수하는 국화과의 아픔이 낳았으나 기르지 못한 미만(未滿)의 슬픔을 가만히 끊고자 무딘 노랑을 민들레로 보았던 것이다 냉이나 달래 앞에 허리를 굽힐 때 담벼락 아래 옆으로 옆으로 번성하며 꼭 하루 부족했구나 우리 사이 들판처럼 멀리 나가는 난색(難色)은 어린..

한줄 詩 2022.04.02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 김애리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 김애리샤 이장인 아빠가 마이크를 잡으면 난정리엔 주황색 난초꽃 향기가 공지사항처럼 번졌다 선거철엔 아빠가 전송하는 하얀 봉투 덕분에 마을 사람들은 조금씩 부자가 되었고 죽산포 술집에서 아빠의 딴따라는 깊은 밤 잠든 파도까지도 깨워 춤추게 했다 아빠가 지금 누워서 볼 수 있는 세상은 천장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천장 가득 태어나는 꽃송이와 춤추는 파도를 바라보는 일 아빠 기저귀를 갈아주는데 항문에서 찌그러진 달덩이가 굴러 나왔다 파내도 파내도 계속 나오는 달덩이 아빠는 점점 가늘어졌다 아빠 속을 다 파먹은 벌레들이 살이 올라 달덩이 흉내를 내며 아무렇게나 빛났다 가난도 아빠를 파먹고 무성하게 자랐었는데 쓸모없다고 생각되는 것들일수록 부지런히 자란다 아빠가 헝겊 인형이라면 배를..

한줄 詩 2022.04.02

기상박물관 벚꽃 개화 구경

해마다 3월 초중순쯤 벚꽃 개화시기를 가늠해 본다. 제주를 시작으로 북상을 하니 서울은 당연 늦게 피는 편이다. 오늘 서울에서 벚꽃이 정식 개화를 했단다. 그 기준은 송월동 기상청 벚나무다. 나이 먹으니 말이 많아지고 좀스러워진다. 난데 없는 호기심으로 생전 안 하던 짓을 했다. 송월동 벚꽃 개화가 과연 표준인지 확인하고 싶어 기상박물관을 갔다. 예전에 교육청에 볼 일이 있으면 가끔 가던 곳이다. 바로 교육청 뒤에 기상박물관이 있다. 지금은 기상청이 다른 곳으로 옮겼지만 그전에는 여기가 중앙관상대였다. 어렸을 때 라디오에서 일기예보를 해주던 김동완 선생의 정겨운 목소리가 생각난다. 그 기상대 건물을 허물지 않고 잘 보존해 박물관이 되었다. 벚꽃이 절반은 피었겠지 했는데 이제 막 봉오리가 맺기 시작했다. ..

여섯 行 2022.04.02

디 에센셜 - 김수영

오래 전에 김수영 전집을 읽은 후 김수영의 글을 이렇게 몰입해서 읽은 적이 없다. 김수영 시인은 1921년에 태어났다. 이 책은 탄생 백주년에 맞춰 나온 책으로 김수영 시인의 엑기스를 모은 책이라 하겠다. 60년이 지난 작품인데도 여전히 세련되게 읽히는 걸 보면 그의 재능을 가늠할 수 있다. 그는 일제시대에 교육을 받았고 연극을 하다 시를 썼다. 육이오 전쟁 때 거제소 포로 수용소에서 2년 넘게 살다 석방된다. 만약 그가 백석처럼 북에 남았다면 이런 작품이 나올 수 있었을까. 분단으로 인해 많은 분야가 손실을 입었지만 예술계도 아까운 인재들이 묻히거나 단절되는 손실을 입었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분단 세금이다. 그의 시는 읽는 맛이 있다. 특히 , , , , , , 등이 유독 읽는 맛이 있었다. 자주..

네줄 冊 2022.0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