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발 없는 남자의 구두 - 배한봉

마루안 2022. 3. 24. 22:35

 

 

발 없는 남자의 구두 - 배한봉

 

 

구두를 사려고 마트에 갔다.

정든 나의 구두.

몇 차례 굽과 밑창을 갈았던 구두가 이제 더는 버티지 못하겠다고 너덜너덜 삭아 내린다.

어떤 것이 좋을까. 이것저것 신어보며 진열대를 한 바퀴 살펴보는데, 누가

나를 빤히 쳐다 보고 있다.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얼굴을 돌리는 그 남자,

 

발이 없다.

 

무엇엔 놀란 듯 화들짝, 휠체어를 돌리는 남자의 등이 막막하다. 그가

미처 거둬가지 못한 눈빛이 한참이나 남아 서성대는 구두 진열대 앞에서 나는, 깊은 허방에 빠진다.

 

깜깜하다.

 

발 없는 사내.

그가 물끄러미 바라보다 흘린 마음 참 오래 깜깜해서 나는

낡은 구두가 지켜온 내 발 덥석 두 손으로 감싸본다.

 

울컥, 가슴 복받치는 발 고린내!

 

내가 사려 했던 구두는 발 없는 남자를 따라갔다.

나는 이제 구두를 탓하지 않게 됐다.

 

 

*시집/ 육탁/ 여우난골

 

 

 

 

 

 

북극성 - 배한봉

 

 

창문 틈을 파고드는

드센 바람 소리.

 

상처에 소금을 뿌리며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말처럼

 

누군가의 푸르름을 죽이고 돌아온 낙뢰처럼

 

우리 생활의 절벽에

숨구멍처럼 만들어진 창문 안으로

중력조차 무시하고 파고드는

비수의 시퍼런 광기.

 

호시탐탐 칠흑의 창밖에서 우리를 겁박하는

현실의 시커먼 광기.

 

그런 하루하루, 간도 쓸개도 다 녹아내리고 없는 밤,

어떻든 살아야 한다고

 

시리고 캄캄한 우리가 잠드는 방을,

뜨거운 심장만이 재산인 우리의 가난한 방을

가만히, 오래, 쳐다보고 있는

 

또렷한 저 북극성.

 

 

 

 

# 배한봉 시인은 1962년 경남 함안 출생으로 경희대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98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으로 <주남지의 새들>, <우포늪 왁새>, <흑조>, <악기점>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