섣부른 저녁 - 최규환
방향을 정하지 않고 떠나는 날이 있었다
확률과 운으로 점쳐지는 조합인 것 같아
연고와 인연을 찾을 수 없는
되도록 사랑을 잃고 떠돌았던 언덕이나 숲으로 가고 싶었다
목적을 모르는 삶에 적당한 휴일
대합실에서 두 시간을 서성이며 신이 우리에게 넘겨준 협소를 염두에 뒀다가
몇 해 전 낯선 읍내를 지나면서 보았던 풍경이 생각났다
오일장이 파하는 무렵이었고 상인들은 식은 커피를 나눠 마셨다
종일 비슷한 태도로 방을 나눠주었을 여관 주인의 꼬부라진 말투가 친근했다
내려놓고 사는 것은
마음이 흔들리는 순간을
버려둘 수 있다는 말을 새겨두는 사이
가마치 통닭집에선
기름에 부풀려진 내막이 튀겨져 나왔다
스스로 용서가 안 되는 나의 비겁과
오랫동안 아팠던 길에서 만난 흐린 기억이 자꾸만 떠올라
방향도 없이 떠내려 온 나에게
우연이 만들어낸 극진하고 뚜렷한 목적이 되고 말았다
마지막 손님이 다녀간 장미 미용실엔 암모니아 냄새가 문밖에 서성였으나
나는 어떠한 정서도 읽어내지 못하였고
생의 확률 너머와
어색한 길 사이에서 섣부른 저녁처럼 쓸쓸하게 뉘우쳤다
*시집/ 설명할 수 없는 문장들/ 문학의전당
내려앉는 빛 - 최규환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저 새는 왜 날지 못하고 어둠에 앉아 저러고 있냐고
황망에 드는 어둠이었나
가여운 날개에 대고 뱉어낸 사람의 말은
그냥 웅성거림으로 떠다녔다
두루마리처럼 펼쳐놓은 세상을 내어주었던 건
어둠을 읽고 가라는 착한 비유였으니
새의 날개가 묻힌 자리에 앉아
흩뿌리듯 먹이를 주고 간 눈물이
개천 돌다리에 반짝이다가
날지 못하는 세상에 길들여진다는 걸 알고 있어서
누군가의 마음으로 내려앉는 빛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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