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섣부른 저녁 - 최규환

마루안 2022. 3. 26. 21:21

 

 

섣부른 저녁 - 최규환

 

 

방향을 정하지 않고 떠나는 날이 있었다

 

확률과 운으로 점쳐지는 조합인 것 같아

연고와 인연을 찾을 수 없는

되도록 사랑을 잃고 떠돌았던 언덕이나 숲으로 가고 싶었다

 

목적을 모르는 삶에 적당한 휴일

대합실에서 두 시간을 서성이며 신이 우리에게 넘겨준 협소를 염두에 뒀다가

몇 해 전 낯선 읍내를 지나면서 보았던 풍경이 생각났다

 

오일장이 파하는 무렵이었고 상인들은 식은 커피를 나눠 마셨다

종일 비슷한 태도로 방을 나눠주었을 여관 주인의 꼬부라진 말투가 친근했다

내려놓고 사는 것은

마음이 흔들리는 순간을

버려둘 수 있다는 말을 새겨두는 사이

 

가마치 통닭집에선

기름에 부풀려진 내막이 튀겨져 나왔다

스스로 용서가 안 되는 나의 비겁과

오랫동안 아팠던 길에서 만난 흐린 기억이 자꾸만 떠올라

방향도 없이 떠내려 온 나에게

우연이 만들어낸 극진하고 뚜렷한 목적이 되고 말았다

 

마지막 손님이 다녀간 장미 미용실엔 암모니아 냄새가 문밖에 서성였으나

나는 어떠한 정서도 읽어내지 못하였고

생의 확률 너머와

어색한 길 사이에서 섣부른 저녁처럼 쓸쓸하게 뉘우쳤다

 

 

*시집/ 설명할 수 없는 문장들/ 문학의전당

 

 

 

 

 

 

내려앉는 빛 - 최규환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저 새는 왜 날지 못하고 어둠에 앉아 저러고 있냐고

 

황망에 드는 어둠이었나

가여운 날개에 대고 뱉어낸 사람의 말은

그냥 웅성거림으로 떠다녔다

 

두루마리처럼 펼쳐놓은 세상을 내어주었던 건

어둠을 읽고 가라는 착한 비유였으니

 

새의 날개가 묻힌 자리에 앉아

흩뿌리듯 먹이를 주고 간 눈물이

개천 돌다리에 반짝이다가

날지 못하는 세상에 길들여진다는 걸 알고 있어서

 

누군가의 마음으로 내려앉는 빛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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