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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 차리고 싶다 - 고성만

살림 차리고 싶다 - 고성만 햇살이 뽀얗게 불어터진 젖 물리면 내가 좋아하는 숙자와 이사 가고 싶다 한 번도 살아보지 않은 동네 작은 방 얻어 들어가고 싶다 떠돌이 악사와 그 애인이 밤새 다투는 소리 샤워하는 소리 키들거리는 소리 서울행 열차가 우르르 지나가는 기찻길 옆 퉁퉁 분 오줌보 비우려 밖으로 나서면 반짝이는 잔별들 한 시절 곱게 늙어가는 약국 고소한 냄새 풍기는 빵집이 있는 네거리 하루하루 쫓기는 탈주범처럼 중고 제품 판매 구인 구직 급전 대출 아르바이트 모집 생활 광고지 죄다 뒤져 살림 차리고 싶다 눈도 코도 오목조목한 숙자와 함께 알록달록 고운 그릇들 장난감 같은 가재도구들 "아이 예뻐!" 호들갑에 맞춰 근사한 미소 흘리며 까짓것 한 번 사는 인생, 큰소리치면서 이불장 빨래걸이 앉은뱅이상 창..

한줄 詩 2022.04.13

버려지는 것들에 대하여 - 김명기

버려지는 것들에 대하여 - 김명기 강아지 다섯 마리와 다리 부러진 고양이 한 마리를 데려다 놓으니 날이 저문다 이 좋은 가을날에도 태어나 버려지는 것들이 있어 저마다 살겠다고 어둡고 습한 곳으로 숨어든다 잊지 못한 자궁의 기억 때문일까 엉덩이를 돌린 채 고개를 파묻고 몸을 떤다 작은 몸에 손을 대면 고스란히 손끝에 전해지는 두려움 지붕을 맞댄 낡은 집들이 세상의 처음이자 전부인 곳에서 아무리 달래 보아도 눈빛은 돌아설 줄 모르고 털뭉치 같은 몸을 더듬는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희미한 신음이 너무나 살고 싶다는 말 같아 나도 신음처럼 그래그래 입내 소리를 어둠 속으로 흘려보내며 무릎 꿇고 팔을 뻗는다 겨우 한자리에 모아 놓은 출처 알 수 없는 생들 어느 집 갈라진 아궁이 속 어둠이 그대로 남은 새까만 눈..

한줄 詩 2022.04.13

우리의 피는 얇아서 - 박은영 시집

울림 있는 시집이란 이런 거구나 했다. 새로운 시집 전문 출판사가 되려나. 시인의일요일에서 연달아 좋은 시집을 만난다. 기분 좋은 일이다. 집이 신촌이라 지척에 있는 안산과 인왕산을 자주 오른다. 보통 인왕산에 올라 안산으로 내려오는 코스가 대부분이다. 내려오는 마지막 지점이 보통 봉원사다. 봉원사 입구에는 엄청나게 큰 백목련이 있다. 목련이 꽃은 예쁘나 진 꽃이 조금 흉하다. 수북히 쌓인 목련잎이 시커멓게 변해가고 있다. 목련 나무 아래 의자에 앉아 있는데 종소리가 들린다. 해거름에 듣는 범종 소리는 처음인 것 같다. 이렇게 사찰의 종소리가 아름다울 수 있구나 했다. 종을 치는 시간이 길기도 했다. 재보지 않았지만 10분은 족히 넘게 쳤을까. 노을을 바라보며 마음을 차분하게 만드는 울림 있는 종소리에 ..

네줄 冊 2022.04.13

대통령의 염장이 - 유재철

예전부터 김영사가 책 제목 장사를 아주 잘한다. 이것도 하나의 경영 방침이다. 아무리 좋은 책도 팔리지 않으면 그저 종이에 불과하다. 신문은 야채를 싸거나 계란판으로 재생 가능하지만 일반 책은 그것도 어렵다. 저자 유재철 선생은 도합 6명의 전직 대통령을 염했다고 한다. 이건희 회장과 법정 스님도 유선생이 보내 드렸다. 이 책에는 나오지 않지만 법정 스님의 속명은 박재철로 유재철 선생과 이름이 같다. 이것도 묘한 인연 아니겠는가. 책은 술술 익힌다. 세상은 요지경이라 죽음도 참 가지가지다. 유명인이나 노숙자나 죽으면 똑같다. 나올 때 혼자 왔듯이 갈 때도 혼자 간다. 공수래공수거라고 하면서도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아득바득 욕심 부리며 산다. 지인의 죽은 몸을 봤을 때나 장례식장에서 잠시 경건해질 뿐 돌아..

네줄 冊 2022.04.12

달동네의 강아지

홍제동 개미 마을에 갔다가 외딴집 옆에 묶여있는 개를 발견했다. 처음엔 엄청 짖더니 내가 눈길을 보내자 경계를 풀고 꼬리를 치기 시작한다. 반갑다고 어찌나 설레발을 치는지 쇠줄이 끊어질 지경이다. 개 보면 그냥 지나가지 못하는 성격이라서 잠시 동무를 해줬다. 내 손이 닿자 배를 뒤집으며 까무러친다. 무척 외로웠나 보다. 가려고 하자 더 있다 가라면서 손등을 연신 핥는다. 개 좋아하는 것도 천성이다.

다섯 景 2022.04.12

어둠의 샅에 귀 하나 새겨 넣고 - 박위훈

어둠의 샅에 귀 하나 새겨 넣고 - 박위훈 발라진 울음이 낮다 한 부음이 자정의 담장을 넘는다 귀를 버린 내게 들리는 핏빛 이명 닳아 쉬어 터진 음정을 재생하는 엘피판처럼 어둠은 등을 맞댈수록 무딘 가시를 곧추세웠다 어떤 관절은 새소리를 달여 무릎이 서고 새벽은 음식물 봉투 속 불은 라면 면발을 딛고 온다 이슬의 찬 독배를 마신 돌배나무가 밤의 태엽을 나이테에 감으며 알려주던 당신의 적소(適所)에서부터 어둠이 시작됐다는 말 가까워질 수 없는 관계는 허기이거나 어떤 소외 식어 화석이 된 심장에 온기가 돋듯 활처럼 휜 허기가 어둠의 거푸집을 할퀼 때 달무리를 감싼 주검의 문양을 보았다 부패된 귀로는 새를 부를 수 없어 어둠의 샅에 귀 하나 새겨 넣고 너를 듣는 밤 나이테에 감기는 비명을 사뿐, 물고 가파른 ..

한줄 詩 2022.04.12

천국의 날씨 - 윤의섭

천국의 날씨 - 윤의섭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 꿈의 잔영은 언덕 너머로 이어진 길이다 나는 미아였다 간신히 집을 찾아 들어갔으나 살던 집이라는 확신은 없었다 나는 미아의 미아다 어딘가라는 곳에 도착 중일 뿐이라는 해몽은 틀리지 않다 꽃이 피면서 동시에 지고 있는 벚꽃처럼 마지막으로 피어난 꽃도 모르고 가장 오래 살다 죽은 꽃도 알 수 없는 벚꽃의 연대기처럼 뒤엉킨 오후 나는 벚꽃을 분다 숨이 다 새어나가도록 끝은 다가오는 게 아니라 다가서서 만나는 것 일어설 이유가 없을 때까지 기진해 왔고 지친 사람들은 서로 곁에 오래 머문다는 것을 안다 그때 가장 적당한 온기다 *시집/ 내가 다가가도 너는 켜지지 않았다/ 현대시학사 루프 - 윤의섭 쪽창으로 하늘을 올려보는 아이 얼굴이 보였다 아이는 순식간에 늙었다 돌아..

한줄 詩 2022.04.12

삼척 간첩단 조작 사건 - 황병주 외

소설보다 재미있는 책을 읽었다. 어릴 때 초등학교는 국민학교였다. 아침이면 전교생이 운동장에 서서 교장 선생님의 훈시를 들었다. 그때 꼭 하던 이야기가 간첩신고였다. 신고를 하면 복권 당첨처럼 큰 상금을 받는다고 했다. 간첩으로 의심되는 정황을 세세히 설명했다. 특히 유난히 친절한 사람이나 담배값을 모르는 사람을 의심하라 했다. 귀에 박히도록 듣던 간첩 이야기라서 이런 책을 보면 눈에 확 들어온다. 실제 간첩도 있었겠으나 대부분 만들어진 간첩이었다. 간첩 하면 북한에서 내려온 거라 생각했으나 나중 커서 남한에서도 간첩을 보냈다는 걸 알았다. 이 책은 역사문제연구소 부소장인 황병주 선생 등 연구원들 네 명이 공동으로 쓴 책이다. 내가 소설을 잘 안 읽는 이유도 이런 책이 훨씬 울림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엔..

네줄 冊 2022.04.10

속절없이 출렁이며 - 강시현

속절없이 출렁이며 - 강시현 당신은 죽어 별이 되리라는 뭉클한 말 때문에 가랑이를 벌리고 고통을 찢으며 나를 낳았지 안날 일기예보에 오늘은 유난히 별이 많이 쏟아지니 지붕에 난 창문을 잘 닦아 놓으라 했어 별들의 유혹이 닥쳐오리니 짓물러진 마음을 잘 묶어 두라 했어 올해는 별 농사가 잘됐어 풍년이야 산마루 가까이 지은 집은 하늘과 가까워 별숲이 더 반짝거려, 별들이 폭설로 쏟아져 별을 녹여 얼굴을 씻고 밥을 지어 먹지 어떤 날은 늙은 별들이 푹푹 쌓여 길을 지워 귀갓길을 잃기도 하지 아랫마을 노파는 보란 듯이 별의 숲에 묻혔지 여기엔 금고도 없고 도둑도 없지 별은 향기로운 스무살 가슴처럼 몰랑몰랑하지 아픔도 상처도 머물지 못하는 별의 무리 속으로 가뭇없이 지워져도 아무도 슬프지 못하지 나를 낳은 여자의 ..

한줄 詩 2022.0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