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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속도 - 복효근

꽃의 속도 - 복효근 주걱모양 조각도처럼 꽃잎이 허공을 조금씩 파고 있다 파인 허공 미세한 가루로 흩어져 날리지만 너무 고와서 나비의 눈을 가리지 않는다 빽빽한 공기가 파여 나가고 빛 조각 분분하다 부서진 빛 가루를 제 몸에 갖다 붙이며 꽃잎이 자란다 조각도가 허공을 파는 소리를 한순간에 몰아놓으면 천둥소리가 날 것이므로 그러면 수많은 벌이 길을 잃을 것이므로 달이 채워지는 속도로 제 몸에 딱 맞는 크기의 허공에 꽃은 꽃을 채워놓는다 저마다 속도를 맞추는 별이 달라서 어떤 꽃은 안드로메다의 별에 제 눈을 맞춰두고 핀다 그리고 다시 잠시 빌렸던 허공을 허공으로 채워놓기 위해 햇빛에게 빌린 것 햇빛에게 어둠에 빚진 것 어둠에게 돌려준다 다녀가는 나비가 발을 헛디디지 않게 그 자리를 메꾸는 소리에 아무도 놀라..

한줄 詩 2022.04.17

달동네의 손금을 읽는 오후 - 송병호

달동네의 손금을 읽는 오후 - 송병호 좁은 고샅길 돌아도 돌아도 제자리인 그 골목엔 숙명처럼 상처 안고 똬리 튼 골목길이 있다 명랑이발관의 해맑은 미소를 지나쳐 엇갈린 오복 담뱃가게 생명선은 차마 풍년 쌀가게 재물선과 영영 만날 수 없는 구획이 되었다 그나마 입시학원의 장래선은 또렷한 선이다 실선들, 흔들릴 때마다 칙칙한 배경의 가끔 끊어졌던 동시상영, 두 편의 영화는 오간데 없고 낡은 영사기 한 대 짓무른 앵글로 바람을 채록하고 있다 한때는 민심을 쥐락펴락했을 선과 선의 공존, 바닥이 다른 면 위의 또 다른 점선들 깨진 유리창 너머 하루를 점치지 못하는 도시의 손금으로 남아 있다 수상학은 믿을 게 못 된다고 툴툴거리며 다 닳아빠진 지문을 가지런히 포개 혼자 졸고 있는 노파 *시집/ 괄호는 다음을 예약한..

한줄 詩 2022.04.17

Beethoven Piano Sonata No.14 Moonlight - Claudio Arrau

#어제 청와대 견학을 다녀온 이후 계속 이 곡을 듣고 있다. 곧 청와대가 완전 개방을 한다지만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때 가는 것과 아무도 살지 않는 빈 집을 가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누구는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고 했지만 맹신에 사로잡히면 이런 말이 무의식적으로 나오기 마련이다. 어쨌든 베토벤의 명곡을 들으며 한 사람을 생각한다.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맹목적인 지지가 때론 판단을 흐리게 할 수 있어 경계해야 한다. 앞으로도 영원히 그를 마음 속에 담고 살겠으나 그동안 고생했다는 위로와 함께 이곡을 보낸다. 내가 좋아하는 연주가의 곡을 좋아하는 사람을 생각하며 듣는 것도 행복이다. 이것은 나에게 보내는 위로이기도 하다. #내가 좋아하는 임동혁의 연주도 혼을 빼놓는다.

두줄 音 2022.04.17

마음이 콩 같아서 - 박수서

마음이 콩 같아서 - 박수서 그런 거 있잖아 책상 위에 놓여있던 화분이 말라 죽어 치워버리면 유독 그 빈자리가 신경 쓰여 무엇이라도 채워 놓고 싶은 마음 어느 날은 외려 비우려 애써도 책상 유리에 붙인 오래된 중국집 광고 라벨처럼 긁어내려 아무리 밀어도 말끔하게 비울 수 없는 젖은 눈곱처럼 끈적해진 마음 그런 마음, 밤새 알을 낳는 흰 눈에게 들킬까 봐 자다 깨다 괜한 알전구만 켰다 껐다, 전선을 팽팽히 잡아당기는 심장 쪽 전류 를 꽁꽁 얼려 망가트리려 냉골을 찾아 웅크리고 울어도 콩콩 뛰는 마음 마음이 마음의 어깨를 툭 치고, 마음이 마음의 마음을 금가게 하고 마음이 마음에게 미안해하고, 마음이 마음을 마음 아프게 하고 그런 마음, 방갈로 짓고 식어버린 도시락이라도 까먹고 싶은 날 멀리 떠나 당도하지 ..

한줄 詩 2022.04.16

지구 6번째 신 대멸종 - 최백규

지구 6번째 신 대멸종 - 최백규 봄이 와도 죽음은 유행이었다 꽃이 추락하는 날마다 새들은 치솟는다는 소문이 떠돌고 창밖엔 하얀 유령들만 날렸다 네평 남짓한 공간은 개의 시차를 앓고 핏줄도 쓰다듬지 못한 채 눈을 감으면 손목은 파도의 주파수가 된다 그럴 때마다 불타는 별들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누구나 살아있는 동안 심장 끝에서 은하가 자전한다는 사실을 안다 늙은 항성보다 천천히 무너져가는 지구라면 사각의 무덤 속에는 더러운 시가 있을까 흙에서 비가 차오르면 일초마다 꽃이 지는 순간 육십초는 다음 해 꽃나무 퍼지는 담배 향을 골목에 앉아 있는 무거운 돌이라 생각해보자 얼어붙은 명왕성을 암흑에 번지는 먼 블랙홀이라 해보자 천국은 두번 다시 공전하지 못할 숨이라 하자 이것을 혁명이자 당신들의 멸망이라 적어놓겠다..

한줄 詩 2022.04.16

청와대 봄 풍경 - 견학

청와대 견학을 다녀왔다. 새로 뽑힌 대통령이 청와대에 들어가지 않고 완전 개방을 한다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 있을 때 가니 마음이 훈훈해졌다. 대단한 의미를 부여할 건 없겠으나 문대통령 퇴임 전에 청와대를 보고 싶어 올해 초에 예약을 했다. 예전에 청와대는 근처에만 가도 검문을 심하게 했다. 청와대와 가까운 부암동에 오랜 친구가 살고 있어 잘 안다. 문통 재직 시절에 청와대 앞길도 24시간 완전 개방을 했다. 그전에는 청와대 앞길도 민간인은 아무 때나 지나 갈 수 없었다. 각종 야외 행사가 열리는 상춘재 잔디밭 녹지원이다. 뒤에 보이는 한옥이 상춘재다. 주로 외빈 접견 장소로 쓰인다. 예전의 청와대인 경무대가 있던 자리다. 이승만 대통령부터 박정희, 전두환까지 여기서 집무를 보았다. 경무대 자리가 명당이..

여섯 行 2022.04.16

친구가 복권을 사라고 했다 - 류흔

친구가 복권을 사라고 했다 - 류흔 어떻게든 견뎌야 한다. 꼬박 오십팔 년하고 삼 개월 그래왔듯 앞으로도 살아야 한다. 깨진 유리조각처럼 뾰족한 슬픔이나 나의 면모가 상세히 기록된 플라스틱 칩 따위 와작 와작 씹어 삼키며 현장에 가야 한다. 그간의 나는 끈질긴 나의 용의자, 누군가에게 추적을 당했다면 범인은 나 자신이다. 고통 없이 잘 찔리기 위해 날을 벼려왔다. 원하는 국면이 찾아오기를 소원하며 살아왔으니 나의 천적이 나일밖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더구나 익지 않은 술을 은밀한 어디에 묻어두었는지 친구에게 가리켜주지 않은 채 나는 죽었다, 어제 밤 야하고 아리따운 꿈속에서. 깜짝 놀라 허둥대면서도 기척 내지 않으려고 아주 멀리 있는 아버지와 가까이 있는 어머니와 다른 방에 잠든 가족을 위해 죽음보다 ..

한줄 詩 2022.04.14

들판의 권력 - 이우근

들판의 권력 - 이우근 꽃은, 자기 자리가 좋으면 얼른 씨를 뿌려 그 자리를 내어주고 홀연히 사라진다 계절을 넘어 더 좋은 꽃으로 피고 들판은 무상으로 임대를 내어주고 그 대부분의 배경과 풍경인 잡풀들은 더욱 생식력이 좋아 더불어 번성하면서 혼자인 듯, 모두 다인 듯 어깨동무할 이유가 없지 않아서 그 아래의 자잘한 것까지 거듭 거두어가며 지평을 넓힌다 창백하나 검소한 겨울이 가면 본능적으로 포실한 봄이 오는 없어도 많은, 넘치는 공간 순환이 순한 곳 그것이 들판의 권력 널브러져 있는 사소한 것들 미세하게 산소를 공급하는 존재들 잊혀진 것들 그러나 아무도 평등이나 계급을 요구하지 않으니, 그 충만한 무욕(無欲), 구름의 미끄럼틀이라 낄낄거리고 바람의 정거장이기도 해서, 그냥 오줌 막 누고 싶은 들판 그렇게..

한줄 詩 2022.04.14

법정스님 무소유, 산에서 만나다 - 정찬주

이 책은 법정 스님의 일대기를 그린 여행기라고 하겠다. 작가 정찬주는 승려는 아니지만 법정 스님의 제자다. 예전에 샘터사에서 일 할 때 스님이 책을 내면서 인연이 닿아 평생 스승과 제자로 연을 맺었다. 법정 스님은 입적하기 전 세상에 말빚을 남기고 싶지 않다면서 자신의 책을 전부 절판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래도 정찬주 선생은 스님을 잊지 않고 이렇게 들꽃 향기가 나는 책을 썼다. 이 책도 스님에 대한 회상기다. 법정 스님이 태어난 곳부터 입적한 곳까지 스님이 살다간 흔적을 찾아 나선다. 스님의 속명인 박재철 소년은 어떤 아이였고 어떤 교육을 받았고 어느 계기로 출가하게 되었는지를 세세하게 따라 간다. 그 사람이 걸어온 길을 보면 정체성을 알 수 있다. 예전에 스님이 쓴 책 무소유와 말의 침묵을 참 열심..

네줄 冊 2022.0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