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이렇게 쓰려다가 - 김태완

마루안 2022. 4. 9. 22:02

 

 

이렇게 쓰려다가 - 김태완

 

 

짧게 쓰기로 했다

 

구색을 맞추려 길게 늘어뜨린 행사장 축사 같은

들리지 않는 귀를 자꾸 만져보고 잘 붙어 있는지 확인하는 자세가

하품을 하거나 초점 없는 눈으로 언제 박수를 칠까 무념의 시간을 허비하는 것보다

조금은 위안이 될 수도 있었다

 

메이커 없는 신발을 싼 맛에 사서 분명 몇 달 버티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실속으로 치자면 싼 맛이 최고다 걸음이 느려지거나 보폭이 짧아지지는 않았다

 

넋두리, 밑줄 치며 한 행 한 연을 곱씹어 읽어보아도 너무 깊은 그 속을

읽어낼 수 없어 한참을 자책하면서 읽던 수준 높은 넋두리

지방의 무지렁이로 사는 나는 짧은 것들만 과일 고르듯 골라 마음에 길을 터주기로 했다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정신없이 갈갈이 찢어지고 쪼개진 몇 분 몇 초가 아쉬운 일터의 치열한 노동은

시간을 밀어내는 기술을 연마하는 중인 것을 누군가는 알고 있을까

짧게 더 짧게 나누어 쓰기로 했다

 

이렇게 쓰려다가

 

아직도 갈 길 바쁜 그대를 붙잡고

나는 왜 이리 장황하게 길어지고 있는가

 

 

*시집/ 다음이 온다/ 이든북

 

 

 

 

 

 

이력, 서 - 김태완

 

 

적당한 양의 물을 만나야 반죽이 된다고 하셨지요

한동안 가만히 지켜보는 기다림을 숙성이라고 하셨고

반죽은 다시 밀가루로 어루만져야 더 힘을 얻는다고

수십 번을 있는 힘껏 내리치는 반복이 꽈배기처럼 꼬이면

꼬일수록 좋은 수타면이 된다고

허공에 빙그르르 돌아가는 뒷모습을 수없이 봐왔지요

만두가 되고 찐빵이 되고 우동이 되는 마술 같은 일들

새벽마다 잔치국수에 해장술을 팔고

장날이면 선지국밥이 끓고 있는 주방 가득 김 서림

뜨거운 닭털을 뽑아 연신 통닭을 튀기는 뜨거움은

가끔 활활 타올라 부랴부랴 불을 끄는 소동도 허다했지요

주방 옆쪽 작은 방 베트남 무늬 커튼 뒤에서 그런 소리를 들으며

반죽이 숙성되는 고요함처럼 숙성인지 성숙인지 알 수 없지만

지금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 아니겠어요

그 뒤로 상세한 이력은 알 수 없지요

남겨진 기억을 잠시 말씀드릴 뿐 그 아픔과 간절함과 먹먹한

희망을 감히 어떻게 적어볼 수 있겠습니까

 

오늘은 동네 식당에 가서 꼬이지 않고 말끔한 그리움으로

잔치국수를 먹어봐야겠습니다

 

 

 

 

# 김태완 시인은 충북 청원에서 태어나 신탄진에서 성장했다. 2000년 계간 <오늘의문학>에 시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추억 속의 겨울은 춥지 않다>, <마른 풀잎의 뚝심>, <왼쪽 사람>, <아무 눈물이나 틀어줘>, <다음이 온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