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북한산의 봄 - 김기섭

마루안 2022. 4. 10. 19:31

 

 

북한산의 봄 - 김기섭

 

 

미처 슬퍼할 새 없이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하지만 내가 사는 변방에는 아직도 눈이 내린다.

경계도 없이 내리는 눈

범람하는 바람 속으로

내 영혼의 머리칼 사이로 봄눈이 날리는 동안

마른 풀잎만 나풀거렸고

생각할 틈도 주지 않고 떠난 여자처럼

먼 산으로 날아간 새는 돌아올 것 같지 않았다.

 

마른기침을 쿨럭이며 객지에서 봄을 기다린다.

꽃이 피고 진들 무슨 상관있을까마는

노새를 타고

아득한 시공을 건너오는 이의 목소리

봄은 꿈꾸는 강을 건너

집시들의 언덕을 지나

더딘 몸짓으로 산기슭을 오르는데

 

보았는가 그대 창가에 핀 목련

세상의 모든 것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시점에서

내 몸에서도

여린 이파리들이 사사로이 돋아나고

밤새 시리도록 별들이 뜨더니

각혈하듯 산벚꽃이 핀다.

미열이 도져 아픈 봄날

살아 있는 것이 죄스러워

숨죽여 일기를 쓴다.

 

뒤늦게 알았지만 그리운 것들은 산에 있었다.

산에 있는 식물들은 죄다 꿈을 꾼다.

그리워서 꿈을 꾸는 거다.

21야영장의 가스등 불빛, 내가 두고 온 이도 거기 산다.

하여 미친 듯 봄이 오면

두둥실 꽃구름 타고 북한산을 오른다.

 

 

*시집/ 달빛 등반/ 솔출판사

 

 

 

 

 

 

봄밤의 동백꽃 - 김기섭

 

 

사람들은 아무도 동백꽃의 죽음을 모른다.

꽃 흐드러지게 피거나 모가지 댕강댕강 떨어져

붉은 선혈 나뒹굴 때

탄성 몇 번 지르고선

그들 죽음을 잊는다.

 

지난봄 햇살 가벼운 날

달마산을 오른 적이 있었다.

그날 동백은

실핏줄 같은 울음 한가득 터트렸고

저녁 산길을 내려오다

맹골도 어깨 위로 피어난,

얼굴에 감기는 노을 한 조각 입에 물고 내려왔다.

 

어두워지는 미황사 부도전을 지나다

동백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양각된 철로 위로

뻐꾸기시계를 열고 나온 보름달이 차오르고

포장할 수 없는 봄바람이 뛰쳐나와

꽃나무를 휘감는데

어금니로 깨물던 터질 듯한 봉오리들이

그림자도 없이 후드득 지고 있는

봄밤의 찰나였다.

 

 

 

 

# 김기섭 시인은 1962년 강원도 화천 출생으로 경원대를 졸업했다. 열여덟 살에 암벽 등반을 시작해 국내 23개의 암릉길과 암벽등반 코스를 개척했다. 2006년 인수봉 등반 중 추락 사고로 지체장애1급 판정을 받았다. <달빛 등반>이 첫 시집이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천국의 날씨 - 윤의섭  (0) 2022.04.12
속절없이 출렁이며 - 강시현  (0) 2022.04.10
불길한 광선과 기이한 날갯짓 - 우혁  (0) 2022.04.09
팔굽혀펴기 - 박숙경  (0) 2022.04.09
이렇게 쓰려다가 - 김태완  (0) 2022.04.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