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을 지나는 법 - 나호열 가을을 지나는 법 - 나호열 가을은 느린 호흡으로 멀리서 걸어오는 도보여행자 점자를 더듬듯 손길이 닿는 곳마다 오래 마음 물들이다가 툭 투우욱 떨어지는 눈물같이 곁을 스치며 지나간다 망설이며 기다렸던 해후의 목멘 짧은 문장은 그새 잊어버리고 내 몸에 던져진 자음 몇 개를 또 .. 한줄 詩 2018.11.08
나는 죄인이다 나는 어머니를 꼭 닮았다. 다른 식구들이 아버지를 닮아 비교적 잘 생겼으나 큰누나와 나는 어머니를 닮았다. 유독 내가 어머니와 판박이다. 잘 생긴 큰형과 비교해 외모가 빠진다는 소리를 들을 때면 어머니가 야속할 때도 있었다. 나를 낳은 어머니는 죄가 없다. 나는 어머니를 파먹고 살았다. 무던히도 속을 썩이고 눈물도 자주 흐르게 했다. 돌아가시기 전에는 몰랐다. 왜 그렇게 모질게 말해야 했을까. 그런 말을 가슴으로 삭히며 속이 뭉그러졌을 어머니를 생각하면 울컥 한다. 나를 세상에 내 놓은 어머니는 죄가 없건만 나로 인해 죄인처럼 살았다. 나 때문에 가슴앓이를 하면서 평생 황소처럼 일만 하다 떠났다. 나는 오래도록 벌을 받을 것이다. 바람이 차가워지는 이때즘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나는 좀더 불행해져야.. 열줄 哀 2018.11.03
단풍나무 한 그루의 세상 - 이영광 단풍나무 한 그루의 세상 - 이영광 자고 난 뒤 돌아앉아 옷 입던 사람의 뒷모습처럼 연애도 결국은, 지워지지 않는 전과로 남는다 가망 없는 뉘우침을 선사하기 위해 사랑은 내게 왔다가, 이렇게 가지 않는 거다 증명서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교정의 단풍나무 아래 앉아 있는 동안 이곳이 .. 한줄 詩 2018.11.03
참회록 그후 - 허연 참회록 그후 - 허연 신을 만났다는 너와 갈빗살을 먹는다. 음식은 사람을 덧없게 만드는 재주가 있지. 죽은 고기와 죽은 잎들. 세월의 이름으로 몰락을 먹는 저녁. 그리움이 남았다고 했다. 경건해지고 싶지만 세월은 여전히 밉다고 했다. 생을 주고 얻은 것은 종유석처럼 자라나는 그리움.. 한줄 詩 2018.11.03
영정사진 찍는 노인들 - 김명기 영정사진 찍는 노인들 - 김명기 걷어낸 가을 들판 같은 이들이 산동네 동사무소 담벼락으로 모여 든다 섬벅 나락을 베어낸 자리 까칠하게 남겨진 밑단 같은 수염 위로 깊숙이 발목을 묻고 흠뻑 젖은 채 경작되었을 저마다의 생이 긋고 간 굵고 깊은 고랑들 그 속에서 단단히 여물어갔을 .. 한줄 詩 2018.11.03
낙조에 들다 - 한석호 낙조에 들다 - 한석호 들길 따라 쑥부쟁이 한나절 지는 들녘을 걷는다. 가슴 풀어헤친 듯 걸려 있는 저 그림 나를 붙들고 먼먼 옛적의 연필 자국 선명한 그림엽서 바람이 떤다. 점점이 타들어 가는 물오리 한 떼 해는 목선이 발갛도록 울고 있다. *시집, 먼 바다로 흘러간 눈, 문학수첩 지리.. 한줄 詩 2018.11.02
生의 정면 - 최서림 生의 정면 - 최서림 앞모습은 웃고 있지만 뒷모습은 울고 있다. 진실은 초라한 뒷모습에 있다고 뒷모습만 그리는 사람이 있다. 짓궂은 나는 염치도 없이 곧잘 사람의 정면을 응시한다. 돈과 명예와 권력으로 포장된 앞모습, 생의 혼돈 너머로 보이는 흐릿한 진실은 뒷모습만큼이나 쓸쓸하.. 한줄 詩 2018.11.02
천사의 발자국 - 박신규 천사의 발자국 - 박신규 세상에 던져진 것들에게 첫 일년은 필생의 시간만큼 험하고 낯설다, 말 못해 울부짖는 짐승 미지근한 물로 온몸을 닦아내도 응급실에 실려가서도 아이의 울음은 점점 더 멀리 깨진다 목 쉬어 자지러진 뒤에도 지구 반대편 마을까지 날아간다 누가 다녀갔을까 가.. 한줄 詩 2018.11.02
좀 떨어져 있는 편, 가을은 - 황학주 좀 떨어져 있는 편, 가을은 - 황학주 상을 받아두고 마루 끝에 앉는다 가지 끝에 얼룩 송송 난 곱다래진 떡갈나무 잎 그러한 빛에 앉았다 가라는 것 같이 물든다 가을은 오래된 집을 나온 마음의 휘청, 하는 마음에 살고 있는 듯 떡갈나무 잎 하나 마루 끝에 내려앉는다 괜히 슬픈 거완 거.. 한줄 詩 2018.11.02
추억의 연장전 - 이은심 추억의 연장전 - 이은심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습관적으로 걷어차이는 공이 비에 젖어 떨고 있다 오직 그리움의 방향으로만 내달리는 내 습관도 골대 밑 작은 발자국들과 함께 젖는다 던지고 받아 안으면서 지는 쪽만 응원하다 목이 쉰 응원가처럼 먼지 위를 굴러도 그게 사랑이라고 네가 떠난 후에야 누가 일러주었다 담을 넘어 기어이 가버렸으면 가다가 돌아왔으면 반반으로 나뉜 마음은 사나흘쯤 증발되었다가 반드시 돌아와 유리창을 깨고 좌충우돌 승부가 뻔한 이 싸움터의 후미진 곳에서 너도 나처럼 바람 빠져 있는 게 아닐까 날자마자 떨어지는 털 빠진 독수리의 궁리가 허공에 목을 매고 고단한 건 아닐까 열광과 야유를 굴려온 운동장엔 어디를 빗맞고 멀리 가던 중이었는지 여기로부터 사라지는 중이었는지 악수를 나눈 추억이 주춤주춤.. 한줄 詩 2018.1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