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낙조에 들다 - 한석호

마루안 2018. 11. 2. 23:00



낙조에 들다 - 한석호



들길 따라
쑥부쟁이 한나절 지는
들녘을 걷는다.
가슴 풀어헤친 듯 걸려 있는
저 그림 나를 붙들고
먼먼 옛적의
연필 자국 선명한 그림엽서
바람이 떤다.
점점이 타들어 가는
물오리 한 떼
해는
목선이 발갛도록 울고 있다.



*시집, 먼 바다로 흘러간 눈, 문학수첩








지리산 노을 - 한석호



1.

남해 금산보다 훨씬 더 붉게 산화한 이름을
나 오래도록 사랑하고 있네.
그 여자, 공원길 걸어갈 때면
뭇 사내들 애완견처럼 순하게 만들어 끌고 가지만
그녀의 눈을 보고 있으면
세상 시름 헤치고 달려온 가시밭길만 생각나네.


무성한 푸름 접고 달려와
팔 벌려 안아주는 만복대의 억새능선처럼
자신의 위험 따위는 천황봉 아래로 던져버리겠다는
그녀들.
너희들 위해서라면 당장
맹수들과 맞장이라도 뜨겠다고,
팔다리 둥둥 걷어붙이고 나서는 세상의 그녀들.


2.

평생을 쪼그려 밥을 뜨다가
끝내 노을의 부름을 받고 달려간
한 여자를 나 오래도록 지우지 못하고 있네.
실크원피스보다는
질긴 월남치마가 더 잘 어울리고
뾰족구두보다는 자신의 남루가 더 편하다고 여기던
그녀.


식구들 다 먹이고
솥단지 박박 긁어 한 그릇 물로 배를 달래던
한 여자의 허기 채워 주고 싶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푸른 등 밝혀 들고
청잣빛 달을 오래 디뎌 걷던,
단 한 번도 동화 속을 떠나지 못하고
자신이 만든 이야기 속에서 붉어져 버린 그녀.


3.

백두 금강보다 높고 깊은 골짜기들 거느린
그 이름을 나 오래 기억하고 있네.
캄캄한 밤하늘에 소원을 판화로 새기며
억새처럼 억세게 질겨져 버린 삶을
둥둥 가슴속 북소리로 달래며 승화원 불길 속으로
스르르 미끄러져 들어간 여자.


속을 다 주고 밀려난 소라껍질처럼
가슴 한쪽에서 휑한 바람 소리가 울어 대면
겨울 바닷가에 가네.
축 늘어진 해안선의 가쁜 숨결 만지러,
만지면 물컹하고 설움이 번져 번져서
온 하늘이 시뻘겋게 불타는 지리산 노을 만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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