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연장전 - 이은심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습관적으로 걷어차이는 공이 비에 젖어 떨고 있다
오직 그리움의 방향으로만 내달리는 내 습관도
골대 밑 작은 발자국들과 함께 젖는다
던지고 받아 안으면서
지는 쪽만 응원하다 목이 쉰 응원가처럼
먼지 위를 굴러도 그게 사랑이라고 네가 떠난 후에야 누가 일러주었다
담을 넘어 기어이 가버렸으면
가다가 돌아왔으면
반반으로 나뉜 마음은 사나흘쯤 증발되었다가
반드시 돌아와 유리창을 깨고 좌충우돌
승부가 뻔한 이 싸움터의 후미진 곳에서
너도 나처럼 바람 빠져 있는 게 아닐까
날자마자 떨어지는 털 빠진 독수리의 궁리가 허공에 목을 매고 고단한 건 아닐까
열광과 야유를 굴려온 운동장엔 어디를 빗맞고 멀리 가던 중이었는지
여기로부터 사라지는 중이었는지
악수를 나눈 추억이 주춤주춤 지워지고
걷어차고 후련해진 운동장 구석에서
누구지 누구지 그냥 지나치고서야
너와의 추억엔 연장전이 없음을 알았다
*시집, 바닥의 권력, 황금알
사람, 너무 긴 이름 - 이은심
닫힌 문은 꼭 두드려보고 싶어요
써보지 못한 말들과 수제 초콜릿과 영수증이 공동관리하는 어느 날은 서랍을 가족이라 불러보기도 해요
때로는 면도하는 그를 훔쳐보았는데
거울 속 깊은 곳으로부터 도무지 돌아오지 않고
벌거벗고도 부끄러움이 없는 피부의 물기를 닦고 보니
고양이 데드 마스크였어요
밖으로 돌다 눈꼬리가 처졌어요
모르는 사람과 밥을 먹고 있는데
커튼이 울면서 발등까지 마구 내려와요
세상에 혼자 올 때 얼마나 무서웠는지
나는 불규칙하게 침묵하는 사람이 되었어요
풀밭에서 자주 넘어지는 것은 내 수정체가 더러워진 탓이고
남이 닦아놓은 길을 반성 없이 걸어 다닌 때문인데
아직 남은 슬픔을 주고받으려면 어디로 가야 하나요
그토록 기다렸던 얼굴을 밤의 서랍 속에 넣어두었어요
서로 다른 곳을 보는 눈동자를 마저 지워도 되겠지요
그의 이름은 너무 길어요
마음이 기운 독방에서 아직 다 부르지 못했는데
그는 점점 많아져요
마침내 소홀해지고 마침내 무심해질 수 있도록
# 이은심 시인은 1950년 대전 출생으로 한남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1995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2003년 <시와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오얏나무 아버지>, <바닥의 권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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